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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집에서의 회한

등록 2008-01-09 20:29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서 여자는 50년 뒤 그 남자네 집을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죽어버렸다.
박완서의 단편 〈그 남자네 집〉에서 여자는 50년 뒤 그 남자네 집을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죽어버렸다.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여자는 어떨 때 남자를 떠나는가. 그 남자와 내가 꼭 닮은 영혼이라는 실감에 진저리 날 때는 아닐까.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친절한 복희씨>)의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소설은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던 연인들의 어설픈 사랑 이야기다. 육이오전쟁으로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된 여자는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청년과 자주 만난다. 전쟁 전,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었던 남자의 청춘은 전쟁의 상처와 함께 이상한 방식으로 부서졌다. 여자한텐 잃어버린 오빠이자 남동생인 양 한없이 다감하게 구는 남자지만, 서울에 달랑 홀로 남은 노모에게는 패악을 부린다. 저 늙은이만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자유로울까 싶어 숨이 막힌다는 이유에서다.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피붙이 때문에 숨 막혀 하는 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이 사라지고 아녀자들만 남은 집에서, 여자는 식구들을 부양해야 한다. 미군부대에 취직해 밥을 벌지만 가난은 날로 남루해져간다. 처녀가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걸 부양받는 식구들이 치욕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읊고 독일 가곡 <보리수>를 들려주는 남자와 보내는 시간은, 현실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도취의 순간이다. 남자의 사랑채 마당엔 5월이 되자 눈치 없는 꽃봉오리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한다. 화려한 폐허를 딛고 가까스로 버티던 여자는 결단을 내린다. 헌신적인 그 남자를 버리고, 맞선 본 상대와 결혼식을 올려버린 거다.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여자는 술회한다. 별안간 닥친 헤어짐 앞에서 남자는 울고 여자도 따라 운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여자는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대칭점처럼 꼭 닮은 사람, 상처 없이 해사하던 서로의 맨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인 그 남자와 함께 ‘생활’을 꾸려갈 자신이. 오순도순 새끼 까고, 그 새끼들을 안락한 울타리 안에서 키우기 위해선 ‘사방이 비 새고 금 가 무너질 것만 같은 만신창이의 집’은 어림없으니. 여자를 진정 불안케하는 남자는 바람둥이나 난봉꾼이 아니라, 허공에 반 발짝 떠 있는 ‘흔들리는 영혼’이다.

오십년 뒤, 여자는 옛날 그 남자네 집을 찾아간다. 집은 거기 그대로 있다. 철문은 완강하게 닫혀 있고 마당엔 보리수나무가 무성한 이파리를 피웠다. 그리고 그때의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이미 십년 전에 죽어버렸다. 어쩌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그의 인생은 융성하지 않았다. 그럼 여자는 잘 살았을까. 겉보기엔 멀쩡했는지 모르나, 내면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여자에게 밀물처럼 닥쳐드는 감정은 회한이다. 불확실한 예감을 낙타의 물혹처럼 짊어진 채 자신이 다급히 도망쳐버렸다는 것을, 투명한 구슬 같던 시절은 제대로 빛나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깨져버렸다는 것을, 노인이 된 여자는 인정한다. 실컷 젊음을 낭비하라고,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라고 충고하는 목소리는 사무치는 후회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대도 여자는 여전히 불안한 남자로부터 도망칠 것이다. 씁쓸한 후회 뒤에 뒷맛처럼 남는 달곰한 추억의 여운. 떠나온 첫사랑의 남자란 여자에게 그런 존재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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