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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카포티의 차가운 시선

등록 2008-01-23 21:40수정 2008-01-23 21:44

걸작 〈인 콜드 블러드〉를 쓴 이후 몰락했지만 훌륭한 예술가로 남은 트루먼 카포티. 사진은 영화 〈카포티〉.
걸작 〈인 콜드 블러드〉를 쓴 이후 몰락했지만 훌륭한 예술가로 남은 트루먼 카포티. 사진은 영화 〈카포티〉.
[매거진 Esc]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훌륭한 예술가가 반드시 훌륭한 인간인 건 아니다. 아 물론, 트루먼 카포티가 훌륭하지 않은 남자라는 뜻은 아니다. 떠도는 풍문이나 재구성된 신화가 아닌, 그의 진짜 사생활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까. 그리고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흠결이 없는 인간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표현을 정정해 보기로 하자. 훌륭한 인간이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지만, 트루먼 카포티는 훌륭한 예술가였노라고.

언제나 그의 이름 뒤를 따라다니는 작품은 두 개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동명영화의 원작으로 유명한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논픽션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젖힌 <인 콜드 블러드>가 그것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카포티>는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쓰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다. 차가운 피. 그것은 작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다. 세계를 바라보는 끔찍하도록 차가운 시선. 그는 끝까지 그 명제에 충실하고자 했다.

1959년 미국 캔자스 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채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은 곧 잡힌다. 단돈 50달러를 강탈해간 떠돌이들의 짓이다. 어떤 사회적 사건을 무심코 신문에서 읽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는 기분에 대해 나 역시 조금은 알고 있다. 신문에서 이 참혹한 기사를 읽은 카포티의 머릿속에서도 꼬마전구들이 반짝였을까? 그가 그곳에 부랴부랴 달려간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새로운 작품세계를 통해 변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변화했다는 평판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예술가도 인정 욕구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후 6년 동안 무슨 일들이 차례로 일어났는가. 사건에 대한 끈질긴 취재, 범인 페리 스미스와의 집요한 인터뷰, 그리고 공적 관계를 넘어서는 사적인 소통을 통하여 <인 콜드 블러드>라는 명작이 만들어졌다. 저널인 동시에 소설이며,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미국 사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작품이다. 허구와 허구 아닌 것의 경계를 교란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동성애자였던) 카포티는 페리 스미스와 특별한 관계라는 소문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카포티는 ‘우리는 같은 집에서 태어난 형제 같다.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온 …’ 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
예민하고 우울하며 예술적인 성향의 스미스에게 카포티가 느꼈던 건 애정일까, 연민일까. 그러나 오랫동안 공들인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고, 스미스의 사형이 미루어지자 카포티는 불안해했다. 스미스가 죽지 않고서는 그 책의 마지막은 결코 쓰이지 못할 것이기에. 사형 당하는 스미스를 방관(!)하고, 카포티의 책은 결국 완성되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는다. 얼마 후 정해진 수순인 듯 그는 몰락의 길에 서게 되지만, 그 동인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왔다고만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명민하고 야심찬 예술가의 내면이 점점 폐허로 변해 갔다면, 많이 가질수록 더 공허해지기만 했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곰곰 되짚어 보게 된다. 예술가로 산다는 건 날카로운 단도로 자기 영혼을 조금씩 저미어 가는 일인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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