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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자들은 ‘잔’을 이해할까?

등록 2008-01-31 14:40

모딜리아니의 ‘어깨를 드러낸 잔’
모딜리아니의 ‘어깨를 드러낸 잔’
[매거진 Esc]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이제 업자들이 한국을 인수하려고 드는데도. 국토개발을, 정부조직을 업자의 시각에서 보는 것은 그게 그들의 본분이니 참겠다. 하지만 교육마저도 업자의 시각으로 보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다. 업자란 열에 투자해서 그 중 하나만 대박만 터뜨리면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면 실패하는 아홉 명의 아이들은 학생 시절에 인생에서 퇴출되어야만 하는가?

이런 적막한 세상에서 지난 세기 초 술과 마약에 빠졌다가 서른여섯에 숨진 화가와, 그가 죽자 이틀 뒤 임신한 몸으로 투신자살한 아내의 그림을 보러 가는 일이 무슨 소용일까. 완전히 실패한 인생들. 라디오헤드의 신보 <인 레인보스>(In Rainbows)를 들으며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 열정 천재를 그리다’ 전에 찾아가 우울한 눈빛을 지닌 인물을 담은 그림들을 차례로 봤다. 귀에서 들리는 건 생산적인 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노래, ‘라스트 플라워스’. 완전히 실패한, 인생 비관자의 목소리.

잔 에뷔테른도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만큼이나 비관적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는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살’도 있었다. 언제였을까? 아마도 남편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시달릴 때가 아니었을까? 그녀가 그린 ‘병석에 누운 모딜리아니’ 연작은 가슴이 아파서 한참이나 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모딜리아니나 그녀의 인물들은 눈을 떴으되 그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눈을 감고 병석에 누운 모딜리아니의 얼굴을 보다보니 그 텅 빈 눈빛마자도 그리울 정도였다.

전시회를 모두 보고 나니 어린아이들이 모딜리아니와 잔에게 남긴 글들이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디 아저씨, 모디 아저씨는 태어나서 참 불행한 일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하늘에 가서도 잔 아줌마랑 잘 지내세요.” “투, 모디. 왜 이렇게 아프셨나요? 왜 자주 술을 드셨나요? 다시 태어난다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덧붙임. 글씨 이상해서 죄송해요.”

한 사람의 일생이란 행이냐 불행이냐로 잘라 말할 수 없다. 평생 술을 마신 사람의 일생도, 남편이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투신자살한 아내의 일생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게 기억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라디오헤드의 우울한 노래가, 절망에 빠진 잔 에뷔테른의 그림이 한껏 우울했던 내 기분을 달래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행진곡만 듣고, 성공비법만 읽는다고 우리가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어깨를 드러낸 잔’을 보여주고 싶었다. 막 사랑을 마치고 몸을 일으킨 여자처럼 그림 속 잔의 두 뺨은 불그스름했다. 두 사람에게도 너무나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니스에 갔을 때다. 단 1년 동안. 그 시절에 모딜리아니가 그린 그림이다. 이걸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이들아, 너희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때로 인생이란 이 정도면 충분하단다. 서로 사랑했던 1년이 있다면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한 것이란다. 아무리 말해도 업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너희들은 곧 알게 될 거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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