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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일으켜봐

등록 2008-06-18 23:41수정 2008-07-07 16:17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일으켜봐.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일으켜봐.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남들의 지적에 굉장히 예민해지고 상처받아요, 소심해서일까요?

20대 후반의 직장인 여성입니다. 이제껏 거의 실패 없이 남들이 말하는 괜찮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사회생활도 고충 없이 잘하고 있구요.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저의 행동에 대한 지적을 하면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 편입니다. 특히 직장에서나 친구들이 저의 잘못을 지적하면 쿨한 척 넘기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은 심정이구요. 남자친구가 저의 잘못을 지적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큰 싸움으로 번집니다. 심해지면 울기도 잘하구요. 그런데 거의 매번 제가 진짜로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고 왜 사람들이 날 이해 못해 주지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곤 합니다. 소심해서일까요? 겸손한 성격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는데 오히려 이중인격인 것 같아 속상합니다. 저한테는 심각한 고민인데 너무 사소한 일을 걱정하는 걸까요?

A 그게 원래, 이십대 후반은 주변에서 다들 못 잡아먹어 안달내는 때야. 직장에서는 신입딱지 떼고 신나게 부려먹을 때니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라며 채찍질을 하지. 친구들은 요맘때 인생의 전환기를 겪어가며 서로의 승패를 알량하게 가늠질하다 보니 공감 대신 이질감만 넘쳐흘러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딨어”라며 서로 긁어대지. 나이 들어 머리가 굳어가는 주변 지인들은 자신이 확립한 그 잘난 가치관을 전파하며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라며 호시탐탐 찔러보고. 남자친구는 마이 페어 레이디를 만드시려다 보니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라며 멋쩍어하겠지? 만약 이렇게 사족 한마디씩 붙이면서 잘못이나 단점을 지적한다면, 그건 대부분 가짜야. ‘이걸 말하면 상대가 상처 받을 걸 알고 있고, 알고 있으면서’ 말해 버리는데, 그건 지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지적하는 방식 자체가 촌스러워서 열받잖니.

‘남의 쓴소리를 곱게 못 듣는 자기보호적 완벽주의자’인 당신이 문제일까? 글쎄. 그동안 꽤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그 지적들 다 접수해서 더 완벽해진들 뭣에 쓰겠소. 본인이 정말 잘못했으면 그 대가는 본인이 알아서 치르도록 세상 이치 돌아가는데, 굳이 비판해서 사람 괴롭히고 단점 직시하고 고치라고 강요한다? 상대는 원하지도 않는데, 자신의 조언이 상대에게 피와 살이 되고 성격 개조도 가능하게 한다고 자부하는 오만한 환상은 노생큐! 우리는 이 짧은 생에서 단점들을 고치려고 전전긍긍 애쓰기보다(미안, 솔직히 고치기 힘들어) 차라리 그 시간에 우리가 가진 장점들을 더 많이 찾아내서 그 장점들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둬야 해. 훈시해주는 사람들보다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한 수 위인 게지. 게다가 내가 왜 그때 욕먹었을까, 내가 뭘 그리 잘못했지, 라며 답답해한들 그 해답은 사실 서른다섯 살은 넘어야 마침내 깨닫거든! 그땐 또 어차피 귀찮아서 뭘 굳이 고치냐 싶고. 아니 대부분 저절로 개선이 되어 있고 막.

정작 당신이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나 성격 너무 까칠하고 모났냐?’가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쿨한 척 넘기며 속으로 삭이는 습성이 고착화되어가는 것. 지금은 요리조리 넘긴다 쳐도 좀 지나봐. 후배들이 입바른 소리 찍찍 해댈 때마다 입 찢고 싶을 텐데, 사다리 올라갈수록 독설이 난무하는 사내 정치 데뷔를 하셔야 하는데, 쿨? 쿨은 개나 줘.

비장과 위장에 열 쌓지 말고, 이건 좀 아니잖아 싶을 때는 상황을 냉동시키지 말고 흔들어! 완전히는 이해 못 하겠지만 그래도 물고 늘어지며 ‘왜’의 소통을 이어가. 나 자신과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느니 불완전한 소통이라도 타인과 갈등을 일으켜보는 것이 그 타인에 대한 인정이자 노력이자 예의인 거야. 그러면 차차 알게 되겠지. 상대가 단순히 기선제압하려고 쇼했는지, 나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었는지, 저마다 결말이 틀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당신은 후련할 수도, 민망할 수도, 후회할 수도, 어쩌면 상대와 더 깊이 소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어. 이렇게 부딪혀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간에 대한 감을 체득해나갈 때 비로소 폭력이 아닌 사랑과 관심의 표현인 비판을 솎아낼 수 있을 거야. 그 노력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계속 겉에선 휘둘리고 안에선 끌탕 신세.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좋은 소식 하나. 나야말로 젊었을 땐 사소한 지적에도 가슴에 칼 맞은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어.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점점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처를 덜 받게 되더라. 낯짝이 두꺼워지고 체력이 달려 그런 것도 있지만 주로 횟수를 거듭할수록 엇비슷한 지적-‘너 참 말 싸가지 없게 하더라’, ‘넌 너밖에 모르냐’, 혹은 ‘너 꼴통 페미년 맞지?’ (오, 이건 대략 칭찬인 듯?)-들을 받다 보면 ‘아, 또 이거냐, 이젠 좀 지겹다’ 싶어 일일이 대응하는 게 바보 같아지더라구. 어느 순간 ‘패턴’을 읽게 되면 비수가 꽂히기 전에 방패로 튕겨내는 요령도 생기고 말야.

그리고 나쁜 소식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날 만큼, 우리가 상처 받을 횟수는 점점 더 늘어만 갈 거야. 그런데 그거 알아? 상처 받은 게 나 혼자뿐이라면 그건 어쩌면 참 다행이야. 사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어야 할 것은, 내가 상처 입는 게 아니라, 뜻하지 않았는데 내가 다른 (무고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거니까.

임경선 칼럼니스트

※ 필자 임경선씨는 다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거쳐 지금은 2030세대의 일과 사랑에 대한 칼럼과 책을 쓰며 ‘캣우먼’이라는 별칭으로 메트로신문과 KBS-FM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 인생 상담을 하고 있다. 최근 낸 책으로는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있다.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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