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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예감

등록 2008-06-25 17:36

유로 2008의 러시아-네덜란드전 직후.
유로 2008의 러시아-네덜란드전 직후.
[매거진 Esc] 김중혁의 액션시대
오늘 새벽(6월 22일)에 대단한 경기를 보았다. 유로2008 8강전 세 번째 경기였고, 우승후보 1순위 네덜란드와 히딩크가 이끄는 러시아가 맞붙었다. 아무리 히딩크라도 네덜란드를 이기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별리그에서 네덜란드가 보여준 공격력은 세계 최고였다. 빠르고 정확한데다 집중력도 높았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히딩크가 아무리 네덜란드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이번 경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고 보니 딴판이었다. 러시아는 네덜란드의 모든 공격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던 네덜란드 선수들이 이번에는 기어다녔다. 축구장이 그렇게 넓은데도 네덜란드 선수들은 러시아 선수들을 피해 다니지 못했다. 거의 모든 패스가 가로막혔다. 축구장에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는 것일까. 히딩크 감독만이 그 길을 아는 것일까.

히딩크의 공격전술은 얄미울 정도였다. 러시아 선수들은 계속 네덜란드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맞은 데 또 맞고 또 맞은 데 또또 맞은 네덜란드의 수비는 결국 허물어졌다. 거기가 약하다는 것을 히딩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선수들과 판 바스텐 감독은 히딩크가 얼마나 얄미울까.

경기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네덜란드 선수들의 표정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경기가 시작될 때부터 그들의 얼굴에는 패배가 드리워져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를 잘 알잖아.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질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도 무거워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네덜란드 선수들의 표정은 이렇게 변했다. ‘거봐, 우릴 정말 잘 알잖아. 모든 길을 다 막고 있잖아’. 물론 이것은 나의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 네덜란드 팀은 평소의 네덜란드 팀이 아니었다.

모든 스포츠는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승리에 과욕을 부리면 승리의 확률은 줄어들고, 패배를 예감하면 패배의 확률은 커진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마음은 시소와 같다. 거기에는 오직 두 가지 결과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승리할 것인가, 패배할 것인가. 마음은 그 두 가지 결과를 계속 오갈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 팀이 러시아 팀에 진 것은 몸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중혁의 액션시대
김중혁의 액션시대
상대방이 나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두려움’과 우리가 경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패배의 예감’이 네덜란드 팀을 망가뜨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팀의 ‘마음’을 장악한 히딩크 감독이 결국 네덜란드 팀의 ‘몸’까지 장악한 것이다. 마음을 뺏기면 모든 걸 뺏기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패배를 예감하지도 말자. 그러면 우리는 어이없이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 팀처럼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김중혁 소설가·객원기자 vonnegut@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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