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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부려먹는 방법을 익히세요

등록 2008-08-06 17:07수정 2008-08-09 18:11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일 욕심 부리다 위염까지 걸렸는데,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늘어나 죽을랑 말랑

저는 이십대 중반의 직장인입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는 제가 정말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상사분들도 그걸 첫 면접 때부터 파악하셔서 ‘그래, 이 친구야!’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 달리 업무량이 더 많고 의사 결정권과 책임도 상당합니다. 처음엔 상사분들이 예뻐해 주시는 게 참 감사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일이라 욕심나서 완벽을 기하고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했고, 성과도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점차 일의 비중이 늘어 저는 다들 모두 퇴근을 하고 난 뒤에도 업무에 허덕일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야근과 주말 출근에 기어이 얼마 전부터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병원에 갔더니 과로와 스트레스로 위염에 걸렸답니다. 문제는 제 업무는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고유한 제 영역의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라는 데 있습니다. 이번에 병원 가느라 잠깐 일을 다른 분들께 맡겼는데 누구 하나 제대로 해 놓지 못해 결국 제가 아픈 몸을 일으켜 야근해서 다시 일일이 손봐야 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잘하고 싶을 뿐인데 잘하면 잘할수록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전 이제 죽을 것만 같아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성과도 만족스럽게 내면서 할 만한 상태로 이어갈 수 있을까요?

A 일 잘하는 분들, 참 상사복들 없습니다. 대체 옆에서 뭣들 하신답니까. 지나가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몸 좀 챙겨!” 한말씀 던지시겠지만 정작 그 분들이 이 일 저 일 끊임없이 쌓아주신 주범이지요. 얘만큼 일 빠릿빠릿하게 하는 애가 없는데, 덕분에 자기 일이 편해지니 아슬아슬할 때까지 시킵니다. 똑똑한 상사라면, 안 짤릴 정도로만 대충 일하는 게 가장 어려운 당신 같은 타입에게 쉽게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고 한 단계 높은 과제를 부과하겠죠? 상사의 격려 한마디에 춤추고, 싫은 소리에 면역력이 약한 당신은 오늘도 남이 채찍질하기 전에 본인이 알아서 스스로를 혹사시킵니다.

인간에겐 한계라는 게 있어 계속 과잉 출력상태로 질주하면 어느 순간 반드시 다 소진되고 폭삭 주저앉습니다. 한번 소진된 에너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선 뭘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렸는지 잊어버릴 만큼 오래 쉬지 않으면 회복되지 않습니다. 더 똑똑한 상사는 이 현상이 반복되면 결단력이나 분별력, 일의 우선순위 설정능력, 열정과 창의성 등이 떨어질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일의 양이 많을수록 일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불보듯 뻔하지요. 당사자도 좋아했던 그 일들이 꼴보기도 싫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왜 그만한 보답이 없는 거야’라며 자폭할지 모릅니다.

그뿐인가요, 무모한 워커홀릭 습성을 가진 사원이 훗날 상사가 되면 더 골치 아픕니다. 그들은 실무자로서 욕심내며 일했던 감각이 몸에 남아, 일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불안하고 어색해합니다. 완벽주의 성향도 있어 부하 직원이 일을 어설프게 하면 ‘답답한 너한테 일을 맡기느니 차라리 내가 후딱 해 버리는 게 빠르겠다’며 일을 도로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이 우수했던 만큼 ‘나는 저 시절에 다 해냈는데 왜 얘는 못하지?’라며 자기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부하 직원에게 충분한 기회도 안 주고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거지요. 당신, 벌써부터 “내가 아니면 안 돼!” 이러고 있으니 가능성 충분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거, 충분히 직장 동료들에게 증명했으니 쫌 릴렉-스! 특정 인간이 있든 없든 얼렁뚱땅 잘 굴러가야 그게 좋은 회사인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자신이 한 모든 업무의 목록을 작성해서 ‘정말 잘해야 하는 일’ ‘걍 대충 해도 되는 일’ ‘무의미한 일’ ‘하기 싫었지만 누가 부탁해서 한 일’ ‘내게 스트레스를 줬던 일’ 등으로 분류해 보세요. 패턴이 보일 겁니다. ‘좀더 여유가 있더라면 이건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이건 사실 내 일이 아니잖아’ ‘이 일은 간단히 처리해 버릴 걸’ ‘요건 일을 나눠 하자고 충분히 요구할 수 있던 건데’ 그렇게 정밀 분석한 자신의 업무환경 데이터를 가지고 상사에게 보고하세요. 더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일을 배분하든, 없애든, 사람을 더 뽑든, 당신에겐 상사의 현명한 솔루션과 액션플랜이 강력히 필요하다고 말이지요.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자, 이건 ‘나약한 민원’이 아니라 상사가 상사노릇 좀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분 좋은 기회입니다. 뭔 소립니까, 엄밀히 말해 이건 당신 문제가 아니라 상사의 관리능력 문제란 말입니다. “상사는 둿다 뭐하냐, 진즉에 얘기했어야지!” 그는 자신에게 약한 모습 보이며 기대주는 이 놈이 예전의 독불장군 그 놈보다 곱절은 이쁠 겁니다. 첫 문단에서 말 잘못했네요. 일 잘하는 분들일수록 상사복이 없는 게 아니라 일 잘하는 분들일수록 잘난 자기자신을 너무 믿는 나머지 상사 부려먹는 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상사 부려먹는 능력이 진짜 능력이란 말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부림을 당하는 상사들이야말로 가장 똑똑한 상사이기도 하죠.

신경성 위염한테 감사하세요. 질병은 곧잘 헛똑똑이들에게 ‘너, 일하는 방식 좀 문제 있어’를 알려주는 방어기제 신호이지요. 소싯적 저의 종목은 전신아토피와 탈진, 6만원짜리 고단백 링거와 마늘주사 중독이었습니다. 병원비 적게 들어가는 위염에서 당장 멈추십시오. 죽어라 일만 한다고 회사 로비에 흉상 안 세워줍디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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