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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백조’를 구해주세요

등록 2008-09-17 21:41수정 2008-09-19 14:52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저는 결혼 2년차 주부 … 입니다. 참 ‘주부’라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지네요. 작년까지만 해도 솔직히 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습니다. 지금 몸이 좀 아파 현재는 쉬고 있는 셈이죠. 체력이 회복되면 다시 회사에 나갈 생각은 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고요. 하지만 완전 주부도 아니에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회사 인맥을 통해 책과 문서 번역 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건강이 무조건 최고야. 휴식기라고 생각해’라고 위로해 주지만, 이건 쉬는 게 아니에요. 회사 다닐 적 ‘삶의 질’은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현재의 페이스로는 이참에 애라도 낳았다간 내 인생 완전 사라질 것만 같아요. 남편은 ‘걱정 마. 내가 먹여살려 줄 테니까’라고 말하지만, 남편만 자꾸 저만치 앞서가는 것 같고(사실 제 연봉이 더 높았음) 제가 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일하는 친구들은 저의 백조(?) 신세를 부러워하지만 종종 집에서 하루종일 말도 안 하고 혼자 번역하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요. 여자 인생이란 게 원래 다 이런 팔자인가요? 제가 삶의 참의미를 못 깨닫고 불필요한 욕망에 허덕이는 걸까요? 미래가 막막하고 현실이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A 고민은 사소하고, 구체적이고, 유치하게 분해할수록 해결하기 좋아진답니다

원래부터 한량 기질이 농후했던 분이 아니라면, 회사 다니다가 관두면 대개 부조리한 공황 상태가 옵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금단 증상입니다. 제 친구 중 하나는 퇴사하고 나서도 아침 8시면 밖으로 나가 거리를 배회하다가 저녁 6시면 귀가하는 짓을 한달 동안 했고, 다른 친구는 남들 보여줄 명함 하나 파기 위해 잘 나가지도 않는 오피스텔 사무실을 하나 마련해서 매달 목돈 날리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말할 테지요. “네가 가진 걸 감사하면서 살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넌 그래도 팔자 좋은 거다. 너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별로 위로 안 되죠? 저도 그런 말들 별로 안 좋아합니다. 치열했던 워커홀릭에게 하루아침에 마음을 비우고 느리게 걸으라는 주문이 어디 쉽습니까. 그간의 익숙했던 삶을 부정하라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불임치료 하는 사람한테 “마음 편하게 먹어”라는 말만큼이나 안일한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안된 처지와 비교해서 자신의 상황을 자위하는 것은 특히 시답지 않습니다. 비교우위를 따질 건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일 뿐이니깐요. ‘배부른 고민’이라며 고민을 못하게 막는 건 참 반인권적이죠. “건강이 최고야.”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건강‘만’ 하면 그건 또 뭣에 쓴답니까. 땅 꺼지도록 한숨 쉬고 싶음 그래야죠.

단, 보아하니 당신의 고민 ‘형태’는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삶의 참의미’니 ‘여자의 인생’이니 하는 거대 담론은 가급적 잘게 잘게 분해해야 합니다. 저만 하더라도 지난 한 주간 남의 고민 상담해줄 처지가 절대 못 될 만큼 ‘나 사는 게 왜 이렇게 후졌니’와 ‘난 이제 글러먹었어’ 속에서 허우적댔는데요. 산 정상에 올라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닥에 깔린 것들은 종국엔 이놈들이었던 것입니다.

l 먹고 싶었던 2000원 넘는 빵을 집게로 집었다 놨다 반복만 하다 결국 식빵만 사서 귀가하면서 서글펐습니다.


l 온라인 쇼핑몰에서 1900원짜리 브이넥 티셔츠 건졌다고 좋아라 했다가 한 번 입고 빨았더니 목 부분 완전 늘어나 버렸습니다.

l 내 모든 핸드백 안에는 주유소에서 나눠주는 싸구려 티슈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l 자존심의 마지노선 - 만원에 석 장 하는 속옷을 그만 홧김에 집어 버렸습니다.

l 그리고 중국 펀드가 바닥을 쳤습니다.

요는 현금화시키지도 않을 펀드의 현재 성적에 마음이 지레 위축되어 소비행태 비굴해지면서 ‘난 이제 여자도 아냐’ 이러면서 호들갑 드라마퀸 떨고 있었던 거죠. 제가 드리는 말씀인즉슨, 거창한 고민의 배경에는 종종 이런 자잘하고 불쾌한 에피소드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 형이하학적인 것들이 불쾌한 채로 해소도 안 되고 해석도 안 되고 그대로 쌓이고 엉키다 보니 형이상학적 고민 타령으로 승화가 된 것이죠. 만원에 석 장, 그까짓 거 안 사 입고 빨래만 좀 더 돌리면 되었던 것을!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덩어리진 관념적 고민을 당신도 실질적 고민들로 잘게 잘게 ‘번역’해 보십시오. 어떤 일들이 일상 속에 있었을까요? 직장 다니는 친구에게 점심 먹자고 전화 걸었더니 아무도 짬이 안 났다거나, 출판사 담당자의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속이 상했다거나, 며느리가 집에서 논다 생각하고 추석에 자꾸 일 더 시키려는 시어머니 등, 따져 보면 깨알 같은 불쾌함들이 최근 어딘가에 존재했을 겁니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사소한 팩트들이랍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대개 시트콤스럽습니다. 그에 어울리게 고민은 그렇게 사소하고, 구체적이고, 유치하게 분해할수록 더욱 해결하기 좋아집니다. 당신이 마땅히 되찾아야 할 건강을 위해서, 머리 터지도록 고민으로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직장여성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해서도요. 큰 고민을 단번에 풀려 하기보다(그게 어디 해결되는 문제입니까) 실질적이고 찌질한 고민들 하나하나에 의식을 집중해서 노력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인생의 큰 의문들이 하나둘 저절로 풀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관념적인 상담만은 늘 저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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