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무시하는 후배를 어찌할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저는 지금 2년차 비정규직 여성 직장인입니다. 저희 회사가 업무 특성상 서열이 엄격한 편입니다. 한 달 차이라 해도 선후배가 명확한 그런 곳이죠. 저도 처음에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저보다 두 살 어린 선배님들을 모셔야 하는 처지였죠. 그동안 회사 안에서 차별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무난히 지내왔는데, 얼마 전 정규직 친구가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 위에 비정규직 선배가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 선배들 중 몇 명은 자기보다 나이가 어렸고 그러니 자기 위치가 모호했던 겁니다. 처음에는 선배라고 부르다가 정규직인 자신이 비정규직 어린 분들보고 선배라고 하기가 싫었던지 어느 순간부터 ‘~씨’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자신의 위치를 찾고 싶었나 봐요. 과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과장님은 오히려 “먼저 선배 노릇을 하라”며 알아서 해결하기를 원하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시더군요. 저는 그 호칭을 참을 수 없었고 그 녀석은 나와 몇몇 선배들에게 비정규직이라는 처지를 내세우며 선배라고 부를 수 없다고 당돌하게 나오는데,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을 못찾겠네요. 상사가 도와주는 자세도 아니고요. 그도 정규직이라 정규직 후배 편을 드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요즘 이 일로 고민인데 경선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A 행동 뒤의 감정에 귀 기울이면 ‘선배님’ 호칭 이상 챙길 수 있답니다
우리나라 직장에선 직급과 연차로 깔끔하게 교통정리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연령주의, 인정주의, 집단주의, 학벌, 성별, 입장 변화, 텃세 등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니까 호칭 문제, ‘님’자 붙이는 문제, ‘존대’ 문제가 얽히고설켜 난감해지기 일쑵니다. 가령 대졸자 신입과 고졸자 고참, 신참 대리와 말년 대리의 호칭은 맞먹어도 되는 건가. 남자가 나이 많다고 동 직급 여자 동료 호칭에 ‘님’자 빼며 여동생 대하듯 해도 되는 건가. 친구처럼 지내던 동갑내기가 먼저 승진했을 때 바로 호칭 존대 안 쓰며 질질 끄는 짓은 치졸한 건가. 처음 만났을 땐 나보다 아래 직급이었는데 다시 만나니 나보다 위 직급이면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가. 아 피곤해. 소모적인 이 알력, 이 신경전. 목소리가 큰 사람, 가장 위압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 타인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보통 교묘한 하대 호칭으로 상대의 골을 제대로 지르죠. 그들의 논리로 본다면 사내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때려 눕히거나’ ‘짓밟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과연 이 ‘존심’ 문제는 제로섬일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제아무리 언제 누가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이기적인 직장내 인간관계라 해도, 상대의 ‘선’과 ‘상식’에 일단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그 후배가 당돌하지만 호칭 문제 빼놓고는 객관적으로 쓸 만하다 싶으면 이참에 선배답게 ‘내 사람’ 한번 만들어봐야 합니다. 우선 열받은 비정규직 선배들(복수) vs 정색하는 정규직 후배(단수)의 구도로 개인을 향해 집단투쟁하는 것부터 걷어 내구요. 웬일로 상사의 조정하에 설사 그/그녀의 맹랑한 ‘선배님’ 소리를 듣는다 한들 그런 엎드려 절 받기는 도리어 기분만 더 더러워지니까 관두자구요.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상대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감정·욕구·의도에 귀 기울여 주세요. “난 힘들게 준비해서 정규직으로 들어왔는데 완전 차별이 없을 거면 억울하게 뭣하러 정규/비정규 나눈다냐.” “선배가 선배다워야 선배지.” “여고생들 텃세 같다. 여자들이 더 권위적으로 굴어서 되겠냐.” “사실 다른 선배들은 괜찮은데 한 사람에게만큼은 곧죽어도 그 단어가 입에서 안 떨어진다.” 등 그 녀석이 ‘꼬기로 한’ 나름의 배경이 있을 거라 유추됩니다. 잘 들어 주고 제발 반론할 거리에 집착하지 맙시다. 이번에는 당신이 표현할 차례. “우리도 2년간 여기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일해 왔고, 그 부분을 최소한 호칭이라는 상징적 예우로 후배들에게 인정받길 원해.” “비정규직이라고 무시하면 상처를 받고 의욕을 상실하게 돼.” 마무리로 쌍방의 욕구를 절충하는 방안을 제안해 보는 것도 회사 식당 밥 더 먹은 이의 몫. “적어도 상사가 있는 앞에서라도 선배라는 호칭을 불러주면 좋겠다.” “‘님’자를 빼고 그냥 ‘선배’라고만 부르면 안 될까.” 당신이 불필요한 마음고생으로 괴로웠듯, 내심 가시밭길이었을 그 후배를 비난하는 대신 업무 협조를 받자는 겁니다.
갈등관계에선 결과 그 자체 이상으로 상호간에 자신의 고통의 근원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져도 속에서 뭉글대던 가래는 웬만큼 없어집니다. 그런 기회를 먼저 제공하는 게 대인이자 선배의 역할이죠. 특히 사원간 호칭 문제는 다 벗고 덤벼야 하는 커리어상의 실질적 위협이 아니라 순수히 자존심, 즉 감정적 문제이기 때문에 피차간에 찌꺼기를 ‘석션’해 주면 그만큼 의미 부여도 축소될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러 ‘선배 노릇’을 했는데도 반응이 없으면 이제 그만 그녀를 놔버려요. 할 만큼 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법적으로 그렇게 부르라고 목 조르며 강요할 순 없잖아. 사실 ‘씨’든 ‘선배님’이든, 막말로 ‘씨’자 붙여도 정중히 부를 수 있고,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싸가지 없게 돌려칠 수 있는 것.
그래도 속 터져 못 참겠으면? 상대가 ‘~씨’라고 자꾸 씨부렁대면 나는 “~씨야” 하고 ‘야’자 하나 더 붙여 불러봐요. 그거 듣는 사람 되게 기분 나빠요. ‘우리 팀 막내 ××씨’ ‘싱싱한 신입 ××씨’ 등의 애정 어린 사족 별칭 세트도 괜찮겠네요.
임경선 칼럼니스트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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