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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접고 10년 동안 남친과 여행, 현실도피일까요?

등록 2008-11-19 20:49수정 2008-11-23 14:43

사회생활 접고 10년 동안 남친과 여행, 현실도피일까요?
사회생활 접고 10년 동안 남친과 여행, 현실도피일까요?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답답한 사회생활 접고 10년 동안 남친과 여행을 떠나려는 저, 현실도피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평생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나와 결혼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면서 매달 70만원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에 미숙했던 전 그와의 미래를 꿈꿨죠. 그런데 그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현실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세계 여행을 같이 가자더니 한 10년 뒤에 한국에 와서 책을 쓰자고 하더군요. 처음엔 황당했지만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생활과 직장 생활은 그와 나에겐 아주 어렵고 답답한 그 무엇이었어요. 저희는 한곳에 6개월 이상 정착을 못 했어요. 사회부적응자인지, 인간에 대한 환멸이 그 도를 더해 가고, 안정과 잘 정돈된 일상은 그저 남의 일처럼 여겨집니다. 또한 가족은 저에게 어려움만 가중시키는 어떤 존재일 뿐입니다. 홀어머니와 동생 부양하는 착한 딸 노릇 이제 좀 그만하고 싶습니다. 동생도 내년에 스무 살이니깐요. 그리고 떠나고 싶어요. 더 큰 세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밀월을 꿈꾸며. 이건 현실도피일까요, 아니면 제가 떠나는 것이 맞을까요? 어떻게든 한국에 정착해 사는 것이 맞을까요? 삶에 딱 정해진 유형은 없잖아요. 저에게 정상적인 삶이 있다는 듯 거들먹대는 인간들이 꼴 보기 싫습니다. 저는 사실 어렸을 적부터 소설가가 꿈이란 말입니다.

A 내 인생 가지고 소설 쓰지 맙시다

정상적 삶 거들먹대는 인간들 재수 없다면서 김어준씨나 내게 뭐가 맞냐고 집어 달라는 걸 보니, 우린 상당히 ‘비정상적’으로 비춰지나 봅니다.똘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만. 어쨌거나 인생은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어차피 지는 게임인데도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아등바등 살다가 실망을 거듭하며 시들시들 모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죠. 삶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깔고 있고요. 그렇지만 실망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면 인생의 무의미함이 주는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만큼 무책임한 애인보다, 우울한 일상에 대한 응급 진정제로 그칠 환율 압박 외국여행보다, 당신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완화시켜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어서 자력으로 찾아내야만 합니다.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나요? (아니면 그냥 ‘소설가’가 되고 싶은 건가요?) 당신의 유일한 희망을 중심으로 얘기해 봅시다. 세계 여행 떠나면 인간의 스케일 키우고, 글 소재 얻는 데 도움되고, 영화 <실락원>처럼 현실에 절망한 두 연인의 도피성 밀월여행이니 완전 드라마 같겠지요. 하지만 진짜 드라마-당신이 원하는 ‘정상적’인 것의 반대 너머에 있는 삶들은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 깔려 있고, 환멸을 느낀다는 그 소시민들 하나하나가 실은 저마다의 특별하고 병적인 이야기들을 품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처절하고 불완전한 이들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십년 후의 책 표지 디자인을 상상하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하루에 한 시간씩만이라도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뭔가를 쓰고 있어야만 합니다. 약속은 이걸 날마다 오년이 되든 십년이 되든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거. 꼭 어딜 가야 글 써집니까? 소질이나 재능이나 천재성 따위는 앞장의 공지영씨 말마따나 ‘엉덩이의 힘’ 다음에 의미가 있는 거지, 그 전까지는 나 자신과 얼마나 여분의 장치 없이 ‘…’로 마주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뭐라도 쓰지 못할 것 같으면 책을 읽어요.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어서 책으로 세계 여행을 하란 말이죠.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그 책을 읽기 전과는 조금씩 다른 장소로 나 자신이 이동하고 있을 거예요.

자아 발견을 위해 여행 간다는 거, 안 좋은 상황에서 이 나라를 뜨는 것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도피성입니다. 이런 분들, 의미 부여하는 것 좋아하고 그 고통도 모르면서 ‘자아 실현’이라는 단어도 참 좋아하죠. 자아 실현을 위해선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괴롭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마치 ‘싫은 일은 안 해도 되는’ 완결된 유토피아처럼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꿈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서 하려는 것뿐일 수도 있고요. 이건 ‘자아 실현’이 아니라 ‘타아 실현’입니다.


반년이면 못 견딘다 했죠? 평생 꿈이었던 소설 쓰기 역시도 지금처럼 참아야 할 것 많고 중간에 짜증나는 일이 산더미일 겁니다. 그 어떤 분야에서도 자신을 정당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은 거지요. 그래서 의욕과 자신감 상실일 때 곧잘 여행은, 목차 제목이 책 내용의 전부인 자기계발 실용서들처럼 너무 쉽게 희망의 착시효과를 주곤 합니다. 어차피 돈으로 살 수 있는 판타지는 가짜!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내 인생을 가지고 소설 쓰려 하지 말고 진짜 소설을 써보세요. 사탕발림 풍문과는 달리 당신이 바라는 인생의 대전환은 주로 그쪽에서 우리를 선택하지, 우리가 우리 스케줄대로 그쪽을 선택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정신을 가다듬고 성실히 준비를 하면서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것뿐. 그래요, 어쩌면 그 놈의 망할 기다림 때문에 인생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네요.

임경선 칼럼니스트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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