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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경기 곱씹듯

등록 2009-10-21 18:21

[매거진 esc] 투쓰리 풀카운트
모처럼 선두 타자가 1루로 나갔다. 뒤이어 요즘 방망이를 제법 돌리는 선수가 회심의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선다.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 순간, 그런데 타자가 공 두 개를 고르는 틈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1루에 있던 주자가 투수의 견제에 걸려 어이없이 객사한 게다. 순식간에 상황은 주자 없이 원아웃. 그리고 허탈해하기도 전에 타자는 투수의 다음 공을 제대로 받아 쳐 왼쪽 담장 너머로 날려 버렸다.

10년도 더 전에 ‘머피의 법칙’이라 이르던 것들이 야구에도 존재한다. 파울 홈런을 친 타자는 그 타석에서 삼진을 먹는다든가, 예시처럼 주루사 후에 홈런이 터진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후자의 경우 대개 홈런의 기쁨보다 주루사의 허탈함이 크다. ‘주자만 살아 있었다면 2점 나는 거였잖아?’ 만약 1점 차로 지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오래 지속된다.

따지고 들자면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주자가 살아 있었어도 타자가 홈런을 쳤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주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투수의 구질 선택은 물론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타자 또한 마찬가지. 1루에 주자가 있다면 병살을 방지하고 주자를 진루시키기 위해 조심스러운 스윙을 가져가기 마련. 하지만 주자가 없다면 마음껏 자기 스윙대로 휘둘러 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의 괴리다. 선현께서는 ‘알면 보이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다르리라’고 하셨다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전과 같은 선택을 할 공산이 압도적으로 높아도, 우리는 마치 진 경기를 곱씹듯 깨어진 사랑을 후회하고, 대책 없이 긁어버린 카드를 후회한다. 좋은 노래도 2절이라고, 뒤집지도 못할 일에 얽매여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찌질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선택하지 못했던 길에 대한 동경은 때로 살아가는 데 적잖은 긴장과 동력을 제공하는 법. 그러니까 나는 아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외야석 저 구석에 앉아 홈런 터지기 직전의 어이없는 주루사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을 게다.

조민준/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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