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주면’ 가벼운 여자인가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연애·결혼 최적화 위한 ‘합방 타이밍’은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어른의 섹스가 있을 뿐
연애·결혼 최적화 위한 ‘합방 타이밍’은 없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어른의 섹스가 있을 뿐
Q 그 남자분하고는 한 모임에서 알게 되어 몇 차례 더 단체로 같이 만났습니다. 처음부터 좀 불꽃이 튀긴 했어요. 며칠 전에 드디어 처음으로 단둘의 만남. 대놓고 말로 안 해서 그렇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흥분되고 애틋한 그 느낌. 저녁 식사 후 술을 조금 마시게 되었는데 밤공기도 차고, 꼴에 연애 몇 번 해봤다고 오늘 밤 뭔 일이 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카페에서 나와 길을 걷는데 그가 손을 잡고 제게 키스를 했습니다. 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받아들였구요, … 문제는 그다음. 그가 저를 집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걸 육감으로 느꼈어요. 솔직히 저도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그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민했죠. 제 나이 이제 서른, 스스로를 책임지는 나이라 해도 단둘이 만난 건 그날이 처음. 첫날부터 응하면 너무 쉬운 여자로 보고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서른 줄 여자면 더더욱 다급한 인상을 줄 것도 같고. 두 사람의 관계에 확신이 갈 때 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그만 저쪽에서 빈 택시가 와버렸고 전 얼떨결에 타버렸지요. 창문 너머로 보인 남자분의 똥 마려운 듯한 강아지 눈망울은 아직도 선하네요. 이번엔 이렇게 넘겼다 쳐도 다음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 저 이 남자 잡고 싶거든요. A 이렇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1. 몇 번 안 봤는데 섹스하면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2. 일찍 자면 섹스만의 관계가 될 확률이 높고, 그런 관계는 결혼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3. 고로 최대한 섹스는 뒤로 미룰수록 좋다. 첫째, 몇 번 안 만났는데 섹스를 허용하면 가벼운 여자라고 오인받는다는 설. 여자가 나를 좋아해서 빨리 잤는데 그걸 가볍게 본다면 그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치졸한 마초거나 자신의 성경험 부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찐따’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보통 호감을 가지고 연애관계를 진행시키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아니 이렇게 흔쾌히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하며 그녀를 더 아끼고 좋아할 것입니다. 이놈의 ‘헤픈 여자’ 콤플렉스는 대부분 여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주기도문 같은 거지요. 부모님들이 강추하는 순결이데올로기(당신들은 정녕 안 놀았소?)의 영향과 더불어 남자들한테 인기 없거나 상처 받았다고 개탄하는 매력 없는 여자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타인의 즐거움을 앗으려는 모략이 도와서 말이지요. 아니, 그렇게 불안해할 거면서 왜 브라랑 팬티는 세트로 맞춰 입고 나갔대? 둘째, 그래서 남자의 만만한 섹스파트너로 전락할까 봐? 처음엔 서로 ‘버닝’할지 모르나 이내 남자에게 만만한 여자가 되고 만날수록 집구석에서 돈 안 들고 게으른 섹스만 하는 관계, 권태기가 빨리 온다는 설. 그래요, 열정이 안착하면 여자들은 불안해하지요. 갑작스레 ‘수치심’을 느끼고 후회가 밀려듭니다. 나 너무 쉽게 줬나 봐, 하고 친구는 거봐 그때 좀 참지 그랬어, 실룩거리고. 그 찝찝함 때문에 그 후로 자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합니다. 평소 안 하던 튕기는 시늉도 해보고, 긁어도 보고, “나 사랑해?” 같은 우문도 던져봅니다. 그놈의 섹스가 원흉 같으니 점점 성관계도 스트레스가 됩니다. ‘몸’에 관해선 뭘 해도 손해 보는 느낌을 떨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이건 섹스의 문제가 아니지요. 차라리 섹스는 그나마 두 사람에게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이었습니다. 문제는 섹스가 너무 강해 관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그 외의 다른 매력과 가치가 없었다는 점이죠. 섹스가 먼저 자리잡아버려서 가로막았던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관계마저 쫑나면? 섹스의 즐거움 역시도 상실된 것뿐이죠. 다시 말해 연애에서 ‘만약 그때 ××했다면’ 식의 가상은 의미 없는 자기위로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섹스 이외에 잡아둘 게 없었다는 것, 아니 이제는 섹스조차로도 잡아둘 수 없다는 점을 인정 못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섹스는 최대한 뒤로 미룰수록 안전하다는 설. 일찍 자면 ‘애인감’은 되어도 ‘신붓감’은 어려우니까? 그럼 대체 몇 번 만나고 섹스해야 가벼운 여자가 아니게 되고 오래오래 잘 사귀어 결혼까지 갈 수 있을까요? 이 남자와 자도 손해 보지 않는 객관적으로 권장되는 시점은? 헌데 이 상황에서 내가 뭐 났다고 “삼 개월쯤 만났으니 이젠 슬슬 한번 해줄 때가 …” “1년쯤 사귀면 어차피 남들은 다 한 줄 아니까 …”라고 합방 타이밍을 조절하겠습니까? 어차피 원나이트스탠드로 시작해도 결혼하는 커플은 있고, 삼 년 아꼈다가 ‘줬다’ 한들 바로 차이기도 하니 연애라는 게 신기하고 재밌는 것. 쉽게 허락했다 해서 쉬워 보이는 것도 아니고 튕겼다고 가치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 남자랑 한번 했더니 바로 도망가데요” 이런 것도, 사실은 남자가 애초에 섹스만 노린 거였으면 대부분 처음부터 여자를 접하는 태도에서 그 의도가 뻔히 보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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