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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등록 2010-01-13 23:21수정 2010-01-17 14:37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시시콜콜한 일은 아내에게 모조리 의지하는 남편 뒷바라지는 어디까지?




Q

‘엄친딸’급인 아는 언니는, 고시를 준비중인 남편을 도서관 보내 공부시키고 본인이 대신 학교 출석해서 수업 듣고 리포트 써주며 학점관리 해준다는 이야기를 명절날 집안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감탄했지만 속으로 전 ‘뭐야!’ 싶었죠. 그런 제가 아버님 양말 한짝까지 어머님 손으로 건네드려야 몸에 걸치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신랑은 ‘남자답고 일 잘한다’는 본인의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 본인이 못하거나 잘 모르는 일, 자잘한 일들은 아예 손 안 대는 습관이 있더군요. 그러니 집안 어른, 행사 챙기거나 여권 만들고 세금 내는 일들이 모두 맞벌이 아내인 제게 넘어옵니다. 나이 서른 먹은 사람이 은행에 대출이자 내는 날짜를 매달 잊어 일러줄 때마다 이래서 남자들을 나이 먹어도 철부지 애라고 하는가 싶었죠. 그래도 저는 선을 그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남편이 중요한 자격증 시험 날짜를 착각해 시험을 못 치게 됐어요. 충격받았죠. 사실 그 시험 준비할 때도 원서 내달라는 둥, ‘좀 해줘’ 버릇이 발동해서 딱 잘라 선을 긋고는 알아서 하라 했거든요. 불안했는데 역시 이런 일이. 제가 확인하고 관리해주는 게 현명했을까요? 남편의 말대로 세세한 일들을 잘하는 제가 챙기는 게 나은 건가요? 못하는 일 하라고 다그칠 바엔 차라리 내가 해주고 마는 게 빠르고 현명할까요? 제가 내조를 잘 못하고 있는 걸까요? 대부분의 평범한 남자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가요?

A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 참으로 사랑받는 타이틀입니다. 남편에게 격려와 위로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여자 자신의 원래 하는 일 외에도 덤으로 ‘여성으로서의’ 감정노동, 돌봄노동, 챙김노동을 해결사처럼 척척 웃는 낯으로 해내는 여성. 물론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바라서는 안 되죠. 미덕의 포인트는 무상의 서비스 제공이니까. 이렇게 남자에게 있어 여자는 영원히 ‘엄마’이어야 하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남자들은 삶 속에서 처음 만나는 여자가 엄마였습니다. 엄마를 통해 ‘여자’라는 성을 인식한 남자들이 세상 여자들을 대할 때 자기 엄마를 투영하게 되고, 엄마에게 의존하는 것을 배운 남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다른 여자에게도 의존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좀 신기한 건, 자고로 의존이라는 건 대개 약자가 강자한테 바라는 건데, 가부장적 가정에서 약자인 아내가 강자인 남편을 향해 ‘저 인간은 나 없인 안 돼’라며 불쌍히 여기면서 돌보는 시추에이션이 펼쳐진다는 거지요. 즉 가부장이면서 동시에 ‘아이’인 거죠.

남편 입장에선 또 이렇게 입막음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이 전쟁터라면 내 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라고. 그래서 가장 안심이 된다고. 스위트한 이 말에 아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질 법합니다. 헌데 남편은 말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나 역시도 가장 편한 상태로 지내고 싶다고 말이지요. 남자에게 결혼의 궁극적 가치는 ‘편안함’이니깐요. 그러다 보니 밖에서는 카리스마 김 부장일지라도 집에서는 케어를 바라는 김 어린이가 됩니다. 책임 있는 어른 대 어른으로 ‘난 이것, 넌 이것’ 이렇게 반반씩 ‘대등’하게 일을 처리하자고 하면 질색팔색하겠지요? 모든 걸 품어주고 챙겨주면서도 늘 웃는 모습으로 날 반겨주어야 할 아내가 아메리칸 싸가지 와이프처럼 ‘더 룰’을 들고 나오면, 소년은 “차라리 혼전계약서를 쓰지?”라며 욱해서 가출해버릴지도 모릅니다.

자, 중요한 자격증 시험 못 친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만, 여태 했던 대로 ‘아이는 강하게’ 키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편이 철부지 아이 같다면 엄마가 아이 가르치듯 해야겠지요. 아이들이 스스로 밥 안 먹는다고 자꾸 떠먹여 버릇하면 언제 숟가락질 배웁니까. 애 힘들까 봐 업어주기만 하면 언제 지가 걸어 다니겠어요. 먹다가 흘리기도 하고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면서 크지 않습니까. 남편의 어리광과 그것을 받아주는 아내가 실은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뿐입니다. 아내를 슈퍼우먼 취급하듯 남편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곤란하죠. 그 ‘누군가는 해야 할 사사로운’ 일들도 못 하는 게 아니라 사내대장부로서 안 하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인스턴트커피일 걸 ‘미스 김이 타주면 훨씬 더 맛있다’는 커피 심부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각자가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상태에서 손쉽게 부부라는 명목으로 ‘의존’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담보로 한 민폐가 아닐까요. 그런 부조리한 의존을 하는 수 없이 부부애의 인내심으로 받아주다 보면 ‘챙김’과 ‘돌봄’이 어느새 ‘잔소리’와 ‘경멸’로 변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합니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또한 부디 아내의 도리를 다 못하는 게 아닌가, 남편의 기를 못 살려주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현모양처의 욕망과 죄의식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설사 본인이 이번 낭패를 계기로 진심으로 이참에 좋은 아내가 되고 싶다고 울컥해도 지금 여기서는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 리스트를 남편분이 작성해서 일방적으로 들이밀고 있잖아요. 책임전가형 발주 서비스 말고 다른 납득할 만한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좋은 아내가 되어주시면 됩니다. 특히나 명절 때 주워듣기 십상인 “누구네는~ 카더라”는 정신위생상 죄다 흘려들으시길. 심지어 그 ‘엄친딸’로 말할 것 같으면 ‘어진 아내’가 아니라 학교 쪽에 고발돼야 마땅할 사기행각의 공범일 뿐이라고요. 대체 그 학교 어디?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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