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남친과 결혼해도 될까요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그를 둘러싼 빈곤의 성격을 지켜보길… 남편 벌어주는 돈만 기대하면 관둬야
그를 둘러싼 빈곤의 성격을 지켜보길… 남편 벌어주는 돈만 기대하면 관둬야
Q 작년에 일하다가 만난 그와 현재 넉달째 사귀는 중입니다. 첫 연애였던 저에게 그 사람은 사랑을 가르쳐주었죠. 헌데 그 사람, 집이 가난합니다. 저는 사람이 꿈이 있고 성실하면 가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생각보다 형편이 많이 힘들더라고요. 그래도 분명한 자신의 꿈을 가진 남자친구가 멋져 보여 제가 돈을 더 쓰고 빌려도 주면서 지내고 있었어요. 문제는 제가 점점 지쳐간다는 거예요. 저는 큰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거든요. 레스토랑에서 하는 식사나 옷 한벌의 선물, 제 친구들과의 어울림, 이 모든 게 그에겐 부담스러운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그는 현재 회사를 나와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요,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하게 되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결혼하자고 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아직 그의 존재를 모르세요. 남자친구는 꿈과 열정이 있고 성실하고 가정적인 멋진 사람입니다. 결혼하면 정말 잘해줄 것 같아요. 하지만 결혼이 사랑으로만 가능한가요? 결혼하면 시부모님도 도와드려야 하겠지요. 주변을 보면 오히려 시댁 도움을 받으면서 결혼하던데…. 친구들은 돈 때문에 남자친구 눈치 보느라 네 생활이 변하지 않았느냐고 말립니다. 사랑하는데 미래가 자신 없어 그와 독하게 헤어져야 할까요? 그가 미래에 대한 분명한 확신만 줬다면, 잘살진 않아도 평범하기만 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나약한 제가 밉고 그에게 미안합니다.
A ‘돈으로 결혼 상대를 결정할 만큼 난 야박하거나 천박하진 않지만, 내가 어쩌다 사랑하게 된 그 남자가 알고 보니 그냥저냥 사는 남자였으면 좋겠다’가 대다수 여자들이 연애하면서 품는 속내일 겁니다. 여기서 ‘그냥저냥 살았으면’은, 내 부모님의 경제적 상황 정도, 혹은 우리 집보다 더 잘살더라도 그걸 빌미로 텃세 부릴 정도는 아닌 적당한 사회경제적 갭을 말하는 거겠죠. 즉 반대로 말하면 그녀들의 최대 두려움은 결혼으로 삶의 질이 지금보다 떨어지는 것입니다. 신데렐라는 안 바라도 현상 유지는 해야겠다는 거죠.
그런데 어쩐다, 사랑하는 그 남자, ‘최소한의 현상 유지’가 힘들 듯한데. 골치 아파지기 전에 미리 발 빼는 게 안전할까요? 저도 몰라요. 그건 미래의 일이고 그렇다면 점쟁이 소관이니까. 사랑의 힘으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알 수 없죠. 사람의 ‘진심’은 그때그때 다르니까. 그러니 지금 이 답답한 실정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해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현실을 ‘관찰’하는 것뿐입니다.
다 좋은데 그의 가난이 싫다고 했죠? 그럼 그를 둘러싼 가난의 성격을 지켜보세요. 물론 가난 자체가 죄는 아니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항의 가난이 있는 반면, 어떤 행동으로 인한 ‘결과’로서의 가난도 있습니다. 그 집의 가난이 어디에서 기인됐는지 알고, 후자라면 그것이 재연될 개연성이 있는지 가늠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또한 남자친구에게도 행여 ‘가난을 키우는 습성이나 사고방식’이 있는지 잔인하지만 확인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돈을 빌려 가서 어떤 형태로 갚고 있는지, 여자가 주로 데이트 비용을 내면 그 후엔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것들도 유효한 힌트가 되겠군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느냐’는 테마 이전에 ‘인간은 무엇으로 “입에 풀칠하고” 사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열정적이고 성실한지요. 그럼 가난한 사람은 꿈도 못 꾸냐고요?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아야 한다’라는 성인의 기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를 정면으로 고민하니까 더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 돈에 대한 ‘태도’를 면밀히 보자는 거지요.
참, ‘태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돈 없는 시부모님들 ‘도와드린다’는 사고방식은 음, 상당히 나이브한 발상일 수도 있겠네요. 티브이 드라마를 보면 우리나라 시댁은 대개 ‘돈이 있고 금전적 지원 해주면서 그만큼 스트레스 주는 시댁’과 ‘소박한 만큼, 대신 터치도 별로 안 해서 속 편한 시댁’이라는 양자구도를 보여주다 보니, 지금 이 경우엔 후자의 ‘약자’ 이미지로 시댁을 상상하기가 쉬운데요, 그게 현실에선요, 부자인데다가 막 퍼주면서 시댁 노릇 안 하는 블링블링한 집도 있고요(정말?) 돈 없어도 시집살이 독하게 시키는 집도 있더랍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대개 그 집 아들이 ‘개천에서 용 난 격’이라 너무 잘나고 아까워서리 감히 ‘도와드림’ 따위가 아니라 당당한 ‘세금’인 거죠. 사실 둘만 가난한 건 어떻게든 함께 ‘우리 둘이 같이 벌어 열심히 살자’며 신혼부부 단칸방 도배질하는 시에프(CF)처럼 아름답게 극복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그분들까지 나서서 괴롭히면 아… 많이 배우고 나름 곱게 자란 내가 왜! 웬걸, 밑지는 쪽은 당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스스로를 관찰하는 것이죠. 내가 젤 중요해, 내가. 여자가 가난한 남자를 선택하는 사치, 즉 다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으려면 일단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어야 합니다. 못 그러면 부모님께 머리끄덩이 잡혀 집으로 끌려오겠죠. 그런 후 ‘그가 못 벌면, 내가 대신 벌어서 그 사람 먹여 살려야겠다’는 고운(?) 마음이 자연스레 우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라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해요’라며 남편이 조금 벌어다 주는 건 용서되지만 내가 벌어오는 모양새는 싫다고 생각하면 가난한 남자와의 결혼은 관두는 게 좋습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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