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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치킨 그리고 택시

등록 2010-06-23 17:38

[매거진 esc] 책에서 배우는 위로의 기술
미중년의 선두주자 손석희 교수가 자신이 진행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생활의 지혜를 전해 화제가 되었다. 이른바 “오늘밤 치킨 예약하셨습니까?” 이야기다. 월드컵 한국-아르헨티나전을 앞둔 6월17일, 그는 치킨집을 운영하는 한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했다. 야구팬이라면 이미 익숙할 “스포츠에는 치맥(치킨과 맥주)”이라는 공식이 이번에 새삼 부각되면서, 한국-그리스전 때 경기 시작 전에 주문했다가 경기 끝나고 2시간 뒤 배달받았다는 경험담이 드물지 않은 상황. 한국의 16강 진출 여부만큼이나 너나없이 촉각을 곤두세웠던 게 “과연 오늘은 치킨을 먹을 수 있을까”였던 두근거림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는 방송이었다. 당시 그 치킨집 운영자의 말에 따르면, 치킨 좀 시켜봤답시고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무 많이” 같은 주문을 넣으면 되레 배달이 늦는다고.

한국 경기가 있는 날 난감한 건 치킨 주문만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전이 있던 날 시내를 어슬렁거려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도로에 차가 없었다. 승용차 없음, 오토바이 없음, 택시 없음. 어째서인지 버스조차 드물게 오갔다. 택시를 잡고자 서 있던 사람들은 기약 없이 텅 빈 도로를 향해 “사람 살려”라는 듯 허공에 손을 흔들어야 했다. 경기가 끝나고 몇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치킨만큼이나 콘돔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더니 숙박업소도 초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누리며 ‘빈방 없음’이었고, 새벽까지 술 마신 사람들이 많아 빈 택시도 없었다. 그날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던 사람으로서는 혼이 빠져나가는 듯 아찔한 상황이었다.

메리언 키스가 더블린을 무대로 쓴 <처음 드시는 분들을 위한 초밥>이 떠오른 건, 아르헨티나전이 끝난 새벽, 시청 인근에서 “사람 살려” 자세로 손을 허공에 흔들며 택시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순간이었다. 그 책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한마디가 있다. “더블린에서는 돈, 사랑, 그 어떤 걸 줘도 택시를 잡을 수 없다.” 그날의 서울 시청 앞에서는 돈, 사랑, 그 어떤 걸 줘도 제때 치킨을 먹을 수도, 택시를 잡을 수도 없었다. 이왕 그렇게 된 김에 콘돔 쓸 기회라도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쩝.

이다혜/<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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