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연작. 인도.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피사체 이상으로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다큐 전문 사진가 이상엽씨
피사체 이상으로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다큐 전문 사진가 이상엽씨
사진가 이상엽(42)씨는 8월 초 한국의 사진가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4대강 살리기 서명작업에 동참해 주세요.” 민예총, 민미협 등 진보적인 예술단체 소속 예술인 연석회의의 일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약 80여명이 동참했고 그 내용은 한 일간지 광고면에 등장했다. 지난 7월에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사진가 10명을 모아 ‘강 강 강 강-사진가들 강으로 가다’라는 사진전도 열었다. 한금선, 노순택, 이갑철 등 한국에 내로라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함께했다. 전시했던 사진들은 올 연말 한권의 사진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8년 전 미선, 효순이 사건 때도 그는 사진가 160여명의 시국선언을 이끌어냈다. 당시 50여명의 사진가들은 미국대사관 앞에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침묵시위를 했다.
사진가 이상엽에게 사회문제는 피사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영원한 주제다. “사진을 사회적 발언의 도구로 선택했지요. 그림,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이 있지만 사진이 소통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카메라를 처음 잡은 것은 1990년대 말까지 발행됐던 진보잡지 <길을 찾는 사람들>(폐간 당시 <사회평론 길>)의 사진기자로 일하면서부터다. 그는 카메라를 잡았으나 고민이 많았다.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사진기자로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학을 하고,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취재현장에 있는 사진기자들과 사진가들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 사회문제가 불거진 취재현장에서 셔터를 누르고 매일 밤 함께 현상하고 프린트했다. 그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 잘 찍었나요?” 고민을 털어놨다. 이때 그는 ‘안산의 부랑아들’,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 등을 찍었다. 95년까지의 일이다.
<길을 찾는 사람들>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프리랜서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그의 사진에는 좀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아시아의 이야기’들이었다. 필리핀 민다나오 무슬림 게릴라, 홍콩 반환, 동티모르 독립전쟁, 중국 변방 등. “당시 환경이 좋았죠. <한겨레21>도 창간하고 모든 시사매체들이 나의 클라이언트들이 되었어요.”
그가 취재한 이슈들은 <한겨레 21>, <월간 중앙>, 일본 <아사히신문>, 월간 <내셔널지오그래픽>(한국판), 일본 주간지 <아에라> 등에 게재되었다. 사진가로서 보기 드물게 논리적인 글쓰기가 가능했던 그에게 일거리가 몰렸다.
쓰나미·대지진 등 아시아 현장 곳곳 누벼 20개국이 넘는 아시아를 돌아다녔다. 1년의 반을 한국을 떠나 있었다. 취재의뢰를 받고 나간 것은 아니었다. “작업을 하고 돌아와서 발표할 매체를 찾아다녔죠.” 그가 아시아를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는 해석에 대한 문제였다. 유럽이나 미국의 사진가들의 시선으로 해석한 ‘아시아’는 많았다. 아시아를 “싸구려 패키지여행이나 하는 곳” 정도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한국 사진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아시아의 곳곳을 찾아다니게 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강도, 교통사고는 다반사였다. 쓰나미가 몰려온 2004년에 스리랑카에 있었고 원촨 대지진이 발생한 2008년에는 중국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2001년에는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내용을 3명의 사진가(성남훈, 이진만, 최항영)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 스스로 기획한 첫 전시였다. 전시 제목은 ‘노 워, 노 크라이’였다. 밥 말리의 노래 ‘노 우먼, 노 크라이’의 제목을 차용했다. 그는 끈질기게 다툼이 있는 세상을 쫓아다녔다. “서구문명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봤던 곳들, 그 상처들을 아시아의 사진가가 찍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1년부터 3년 동안은 사진 기획자로서 ‘이상엽’이 돋보이던 시절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의 삶’, ‘타클라마칸에서 파미르까지, 실크로드에서 보내는 편지’ 등.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취재한 내용과 동료들의 사진을 전시했다. 때로 기획자로서만 전시를 치러내기도 했다. “고민이 생겼죠. 어느새 사진판에서 저를 ‘사진가’가 아니라 ‘기획자’로 인식하는 거예요.” 그는 과감히 기획자 옷을 벗어던지고 사진가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발표하는 장으로 책을 선택했다. “확실히 내 것이라는 물질감”이 매력이었다고 말한다. 대중들은 문턱이 높아 보이는 갤러리가 아닌 곳에서 사진을 쉽게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처녀작은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였다. 매체의 의뢰를 받은 사진과는 다르게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책이었다. 그의 사진은 호흡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책이라는 형식 때문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진을 찍고 그 내용을 출간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지금까지 모두 18권을 출간했다. 그중에서 9권이 공저다. 공저인 <낡은 카메라 들고 떠나자>는 지금까지 7쇄를 찍었다. 스테디셀러다. 자신의 저서인 <레닌이 있는 풍경>은 출판계에서 잔잔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책은 평균 5000권 이상 팔렸다.
그는 90년대 초부터 사진 발표장으로 인터넷도 주목했다. 이미 90년대 후반 사진전문 누리집인 ‘이미지프레스’나 ‘다큐네트’ 등을 동료들과 창립해서 운영했다. 지금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blog/naver/inpho)는 하루 평균 5000여명이 들어온다. 포털 야후의 블로그 랭킹 서비스가 집계한 블로그 순위에서 통상 3000등 안에 든다. 평균 600만개가 생성되고 60만개가 운영되며 그중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블로거는 약 6만개로 추정하는 현실에서 놀라운 순위다. 그는 비결을 “성실한 업데이트”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매일 콘텐츠를 올린다. 모두 사진에 관한 이야기다. 2008년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여성들의 사진은 누리꾼들의 잔잔한 반응을 얻었다. 블로그에서 이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진이라는 콘텐츠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싶은 분들에게 사회적 의미로서 사진”에 대한 것이다.
DMZ 이어 용산철거민·마오쩌둥 등 사진전 준비
이씨는 자신의 “사진인생은 두 번 크게 변했”다고 말한다. 사진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전형적인 포토저널리스트였다고 말한다. 딱딱했다. 사진가로서 새로운 정체성에 눈을 뜬 다음부터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열린 시각이 추가되었다. 요즘 그는 주변에서는 “(사진이) 여유로워지고 풍성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최근에 갤러리 류가헌에서 전시한 ‘이상한 숲 DMZ’에 이어 우리 땅에 대한 이야기를 기획중이다. 용산 철거민과 4대강 이야기도 담길 예정이다. 2000년대부터 꾸준히 작업한 마오쩌둥에 대한 사진도 곧 전시공간을 찾을 예정이다. 그가 지금 찾아낸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에서 열쇠고리 문양, 복을 빌어주는 사람 등 “새로운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위트 넘치는 사진이 궁금해진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사진 제공 이상엽
중국 서부 연작. 멍하이제비.
디아스포라 연작. 금강.
쓰나미·대지진 등 아시아 현장 곳곳 누벼 20개국이 넘는 아시아를 돌아다녔다. 1년의 반을 한국을 떠나 있었다. 취재의뢰를 받고 나간 것은 아니었다. “작업을 하고 돌아와서 발표할 매체를 찾아다녔죠.” 그가 아시아를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는 해석에 대한 문제였다. 유럽이나 미국의 사진가들의 시선으로 해석한 ‘아시아’는 많았다. 아시아를 “싸구려 패키지여행이나 하는 곳” 정도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한국 사진가의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아시아의 곳곳을 찾아다니게 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강도, 교통사고는 다반사였다. 쓰나미가 몰려온 2004년에 스리랑카에 있었고 원촨 대지진이 발생한 2008년에는 중국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한 것은)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해요.” 2001년에는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내용을 3명의 사진가(성남훈, 이진만, 최항영)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 스스로 기획한 첫 전시였다. 전시 제목은 ‘노 워, 노 크라이’였다. 밥 말리의 노래 ‘노 우먼, 노 크라이’의 제목을 차용했다. 그는 끈질기게 다툼이 있는 세상을 쫓아다녔다. “서구문명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봤던 곳들, 그 상처들을 아시아의 사진가가 찍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1년부터 3년 동안은 사진 기획자로서 ‘이상엽’이 돋보이던 시절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의 삶’, ‘타클라마칸에서 파미르까지, 실크로드에서 보내는 편지’ 등.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취재한 내용과 동료들의 사진을 전시했다. 때로 기획자로서만 전시를 치러내기도 했다. “고민이 생겼죠. 어느새 사진판에서 저를 ‘사진가’가 아니라 ‘기획자’로 인식하는 거예요.” 그는 과감히 기획자 옷을 벗어던지고 사진가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발표하는 장으로 책을 선택했다. “확실히 내 것이라는 물질감”이 매력이었다고 말한다. 대중들은 문턱이 높아 보이는 갤러리가 아닌 곳에서 사진을 쉽게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처녀작은 <이상엽의 실크로드 탐사>였다. 매체의 의뢰를 받은 사진과는 다르게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책이었다. 그의 사진은 호흡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책이라는 형식 때문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진을 찍고 그 내용을 출간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지금까지 모두 18권을 출간했다. 그중에서 9권이 공저다. 공저인 <낡은 카메라 들고 떠나자>는 지금까지 7쇄를 찍었다. 스테디셀러다. 자신의 저서인 <레닌이 있는 풍경>은 출판계에서 잔잔한 호평을 받았다. 그의 책은 평균 5000권 이상 팔렸다.
진보신당 연작. 노회찬.
촛불여성 연작.
레닌이 있는 풍경.
다큐 전문 사진가 이상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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