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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코트 끝까지 벗지 않은 이유

등록 2010-12-23 10:36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갓 대학을 졸업한 나는 출판사 인턴사원으로 근무중이었다. 그때 내게 맡겨진 업무는 <채근담> 편집이었는데, 말이 편집이지 아침부터 밤까지 자전에 코를 박고 한글을 한자로 변환하는 게 전부인 단순노동이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에 한껏 부풀어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공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드라이하는 게 즐거웠던 때였다. 당시 우리집은 경기도 일산이었고 회사는 서울의 약수동이라 통근시간만 왕복 3시간에 가까운 거리였다. 때문에 자칫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지하철을 놓치고 지각을 하게 됐는데, 당시 나는 한번만 더 지각을 하면 사직을 권고받을 수 있는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다. ‘아이엠에프’의 시퍼런 서슬 앞에 몸을 사리던 나는 매일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회사에 출근하며 살길을 도모했었다.

새로 산 캐시미어 롱코트에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하던 기분좋은 월요일이었다. 그날은 참 운이 좋았다. 화장도 잘 받았고 타자마자 좌석이 비어 가장 좋은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여유를 부리며 토막난 아침잠을 즐기려던 찰나, 서늘한 바람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퍼뜩 눈을 뜨고 고개를 내려보니 벌어진 롱코트 틈으로 검정색 고탄력 스타킹이 보였다. 초미니 스커트를 입지 않은 이상, 그 자리엔 분명히 체크무늬 반바지가 있어야 했는데 만질만질한 허벅지밖에 보이지 않으니 정신이 번쩍 났다. 새로 산 코트에 눈이 어두워 블라우스만 걸치고, 미처 바지는 챙겨 입지 못한 거였다. 나는 다리를 바싹 오므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꿋꿋하게 출근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고민하는 사이 지하철은 어느새 약수역에 다다라 있었다. 8시40분,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나는 앞으로 무수히 사들일 롱코트를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근을 감행했다.

그날 나는 근무시간 내내 코트를 벗지 않았다. 동료들에게는 감기몸살을 핑계로 댔다. 더운 바람을 뿜어내는 히터가 등을 달구고, 뜨겁고 매운 김치찌개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나는 꿋꿋하게 그 하루를 버텨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반긴 건 침대 위에 놓인 체크무늬 반바지였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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