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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설가와 그의 외삼촌

등록 2011-04-14 10:47

[매거진 esc]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지방에 볼일이 있어 케이티엑스(KTX)를 탔다. 객차 한편엔 선캡을 쓴 상춘객들이 무리를 지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다른 한편엔 피로한 미간을 찌푸린 양복차림의 사내들이 노곤한 쪽잠을 자고 있었다. 짐을 부리기 편하게 옆좌석이 비어 있길 바랐지만, 이미 내 좌석표 옆자리엔 무료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발꿈치를 들어 큰 짐을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어제 읽던 소설책을 꺼냈다. 그때 사내가 실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홱 돌리고, 책 표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책 어때요? 재밌습니까?”

말주변도 없고, 낯가림도 심하고, 뭣보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던 나는 사내의 질문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꽤 읽을 만하다는 성의 없는 내 대답에 사내는 뜻밖에도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은 안 하는 사람인데, 사실 그 책 쓴 작가가 우리 조카딸이에요. 누나랑 매형은 지금이라도 걔가 번듯한 자리에 취직이나 했으면 하는데, 그 애 책을 재밌다고 읽는 사람은 오늘 처음 봤습니다.”

사내가 신기하다는 듯이 책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곤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누르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응, 외삼촌이야. 그래, 글은 잘 써지냐? 아니, 부산 가느라고 기차 탔는데, 옆자리 아가씨가 네 책을 읽고 있더라고. 아주 재미나대….”

그는 통화가 끝난 뒤에도 헤벌쭉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활자를 읽는 척하며 5분 간격으로 책장을 넘겼다. 마치 그게 비주류 작가인 나와 그의 낯모를 조카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져서였다. 목적지인 대전에 도착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내가 얼른 선반에 올려놓은 내 가방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요번 여름에 장편소설이 나온답니다. 그때 우리 조카 책 꼭 사 읽어줘요. 응?”

나는 차마 올여름에 나 역시 장편소설이 나올 거란 말은 하지 못한 채 선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경쟁자가 쓴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열차에서 내리며, 사내가 앉은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모습이 나의 외삼촌을 닮은 것도, 아닌 것도 같았다.

강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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