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박장대소’ 음주기
조지 오웰은 자신의 책에서 인간을 ‘음식 담는 자루’라고 표현했다. 이 자루는 종종 특수한 상황에 직면하면 내용물을 세상에 분출해버리는 ‘웃긴 짓’을 저지른다. 8~9년 전 이맘때였다. 다른 신문사 ㄱ선배와 막걸리를 한잔했다. ㄱ은 다른 사진기자들과는 달랐다. 당시 여자 사진기자는 매우 적었다. 한강에 빠진 반지를 찾는 게 나을 정도였다. 취재현장에서 만나는 남자 사진기자들은 신기한 눈초리와 차가운 시선을 동시에 던졌다. ㄱ만은 예외였다. 어깨에 메기 버거운 취재사다리를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지도 않았고 “네가 찍어봤자 얼마나 잘 찍겠냐”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후배로 ‘막 대했다.’ 고마웠다. 막 대한 선배와 막걸리 한잔은 너무 당연했다. 막걸리는 ‘막 걸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막 대한 선배와 막 거른 술 한잔, 겨울밤이 따스했다. 마구 걸러낸 술은 탁해서 ‘탁주’, 흰색이라서 ‘백주’, 농사에 널리 쓰였다 해서 ‘농주’라고 부른다.
취재 뒤 가볍게 마신 술자리였다. 술자리는 밤 11시를 넘기지 않았다. 막걸리를 담은 자루(나)는 버스에 올랐지만 12월 추운 겨울 뜨거운 버스 안은 자루를 빵빵하게 부풀렸다. 결국 버스 탑승을 포기한 채 택시를 잡아탔다. 마포대교를 건너갈 때쯤이었다. 자루는 구토를 준비중이었다. 인체의 혈액에 약물이나 독성물질이 들어왔다고 판단될 때 구토는 비자발적으로 활성화된다. ‘정신을 차리자, 쏟아내면 안 된다!’ 절절한 각오가 뇌를 강하게 짓눌렀다. 술꾼인 나만의 원칙 중의 하나는 ‘절대로 택시 안에서 구토하지 않는다’이다. 나로 인해 그날 밤 영업이 끝난다면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루 안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택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시원했다. 구토는 진정이 되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택시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 머리가 창문에 꽉 끼었다.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사님을 목청 높여 불러봤지만 그는 ‘비 내리는 호남선’을 룰루랄라 듣고 있었다. 망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택시는 신호등의 파란불 앞에 멈췄다. 옆 차선의 버스에는 영어회화를 듣거나 책을 보는 건강한 시민들이 빼곡했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12월 바람은 칼에 베인 것처럼 차가웠다. ‘젠장!’ 자루는 부끄러웠다.
그 이후로 막걸리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지만 막걸리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우리 술이다. 만들기도 편하다. 곡물을 낟알 그대로 찐 고두밥에 물과 누룩을 붓고 뜨끈한 방바닥에 10일 정도 두면 완성이다. 누룩의 질이 중요하다고 한다. 쌀이나 보리 등으로 만든 누룩을 쓰기도 하지만 밀누룩이 인기다. 밀누룩은 발효가 잘되고 풍미가 훌륭하다. 막걸리는 누룩의 함량이 많을수록 진하다. 막걸리의 인기는 내년에도 여전할 것 같다. 덩달아 가양주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2011년에는 막걸리 마시기에 다시 도전하리라.
박미향 기자
박미향 기자의 ‘박장대소’ 음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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