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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의 싸움’부터 우선 이기세요

등록 2011-01-06 11:17수정 2011-01-09 10:06

‘나와의 싸움’부터 우선 이기세요
‘나와의 싸움’부터 우선 이기세요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사회를 고치는 직업 갖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저는 28살 남자이고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회문제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우리 사회에 공정하지 못한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고,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은퇴하셨기에 당연히 제가 취업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열흘 전 중견기업에 최종 합격했음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전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요. 물론 회사 일이 저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부모님은 차라리 집을 나가라며 화를 내셨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문제는 이겁니다. 저는 정치·경제·교육 전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비합리적이고 공정치 못한 문제를 개선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 싶은데 이런 일을 하려면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엔지오(NGO)에서 사무직으로 일도 잠깐 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일한다고 해서 저에게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큰일을 하려는 저의 생각이 문제인지도 모르죠. 제 자신으로 사는 것이 힘듭니다. 왜 하고 싶은 일은 돈이 되지 않을까 원망도 해보지만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말했듯이 추상적인 틀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A 왜 다 합격해놓은 중견기업을 안 갔느냐, 어디든 일단 들어가서 시작해야 할 것 아니냐, 같은 기성세대스러운 직격탄은 꾹 참고 보류하기로 합니다. 그건 마치 노처녀들에겐 ‘일단 아무나 되는 대로 만나봐라’ 하는 것처럼 실례고, 또 지금 정부의 대기업 중심 정책 탓에 중견기업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자, 그리하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확실히 결정했다면 나머지는 독한 마음 먹고 가는 수밖에.

한데, 님은 마음먹었다고는 하는데 각오가 안 보입니다. 본래 어떤 일을 미칠 만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혼란과 불안 대신 생기와 의욕으로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아서라 해도 본인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 애쓰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인터넷 강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자란 이가 아무리 주입식 교육이 어쩌니 저쩌니 해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태만으로밖에는 안 보입니다. 사회정의를 위한 직업 자체가 없어서? 그 입구가 너무도 다양해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아니면 좋아 보이는 자리는 나에게 제공되지 않아서? 아니면 내가 정말 의욕이 날 수 있는 장소를 제대로 못 찾아서?

이상과 현실부터 깨끗하게 발라드리는 게 빠를 것 같네요. 사회정의와 사회문제 개선은 하나의 비전이고 그것이 직무기술서가 될 수는 없지요. 사회정의와 연관된 일을 하고 관련 조직에 몸담는다 해도 직장생활이 주는 일반적인 고통과 직업이 주는 일반적인 회의감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가령 모든 직업에 ‘처음부터 잘 풀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허드렛일만 주어지고 상사에게 깨지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실망과 좌절의 연속입니다. 또한 직장문화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관료주의나 권위주의, 무능한 동료들, 일방적 소통 등 못마땅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조직이 ‘선’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곳일수록 그 괴리감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심지어 돈까지 제대로 안 주면 헉. ‘그저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인데’가 왜 그리도 힘든지. 그래도 내 비전에 조금이라도 근접해 갈 수 있다면 사무직이든, 심부름꾼이든, 주변에서 무시를 당한들, 당연하다는 듯이 기초체력을 길러가면서 끈기 있게 기회를 기다릴 수 있을 겁니다. 매한가지로 이 일도 여느 ‘일반회사’ 일처럼, 도중에 너무 힘들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사회정의는 하나의 비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명함이 아닌, 완장이 아닌, 개인으로서도 얼마든지 깊이 관여할 수 있습니다. 견고한 사회적 지위를 쌓은 뒤에 그 지위가 주는 영향력으로 범위를 크게 두고 개선에 분투하는 이도 있고 정당활동이나 생각 나눔, 기부, 후원, 입양, 봉사, 1인 시위, 야학교사, 시신 기증에 이르기까지 개인 레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고 자유롭고 자발적입니다. 창의적으로 새롭게 만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켜본 바로는 개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언뜻 사회정의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장소에서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을 수료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죠. 자신의 재량으로 나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온전히 지키며 자기 인생 자기가 개척하면서 성실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보여서 그들의 실천이 더 신뢰가 가는 사람들. 그런 개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선의의 전염성이 진짜배기죠.


반면, 보세요.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아 못해먹겠다고요? ‘정치·경제·교육 전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비합리적이고 공정치 못한 문제를 개선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 싶어하는 것’은 심지어 지금의 대통령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는 그 자리에서도 그게 그렇게도 힘들 수가 있다는 거죠.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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