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우정의 맛 ‘코코뱅’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기자님이 혹시 제가 알고 있는 박미향씨 맞나요?’ ‘예전에 동문수학한 그분 맞나요?’
독자들로부터 메일이 날아왔다.〈esc〉 신년호 현미 다이어트 기사 때문이다. 기사를 재미있게 구성할 요량으로 아주 오래전 찍은 흐릿한 얼굴사진을 게재한 탓에 도통 알 수 없는 이들로부터 ‘사람찾기’ 사연들이 몰려왔다. 잊고 지내던 반가운 지인들도 있었고,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들도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 한 지점에 있었을 어떤 사람을 찾는 것이다. 살면서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맺은 기억이 결국 ‘나’를 만드는 게 아닐까? 결국 기억의 총합이 ‘그 사람’이 아닐까! 선배 ㄱ이 고향 친구 ㅈ, ㄴ과 한잔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점잖게만 보였던 선배는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하는 혈기 왕성하고 장난스런 고등학생으로 금세 변신했다.
예전 한 후배는 원숭이 이론으로 남자의 성장과정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남자 중학생은 그저 유인원이라고. 유인원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생긴, 남성호르몬이 왕성한 짐승(고등학생)의 단계를 지나야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 단계가 한참 지나 점잖은 신사가 된 선배 ㄱ과 ㅈ, ㄴ이 예전 한때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고향 목포에서 서울로 유학생활을 시작한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외로운 서울살이를 튼튼하게 지켜준 것은 우정인 듯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으로 “500㏄ 맥주가 무지 많게 느껴”질 만큼 조심스럽게 술도 마셨고(범생이였음에 틀림없다), 까까머리 맞대고 낄낄거리면서 초절정 인기 잡지 <선데이서울>도 봤던 이들의 추억이 지금 ‘그들’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의 모임에 다른 후배 한 명과 초청받은 날, 구수한 입담 사이로 고소하고 상큼한 샐러드와 파스타, ‘코코뱅’(coq au vin)이 식탁 위에 등장했다. 장소는 서울 평창동의 한 소박한 레스토랑 ‘모네’.
코코뱅은 그들의 우정처럼 역사가 오래된 프랑스 가정식 요리다. 현대식 가스레인지나 센 화력이 개발되지 않았던 그 옛날 벽난로 등에 냄비를 걸어두고 오랫동안 천천히 끓여 먹은 음식이다. 적포도주에 각종 채소와 향신료를 넣어 졸인 닭고기요리다. 코코뱅에는 포도주가 한두 병 들어간다. 적포도주의 질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난다. 프랑스에서는 1990년대부터 ‘슬로 쿠킹’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조리법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며칠 뒤 프랑스 출장길에 원조 코코뱅을 맛볼 기회가 생겼다. 진한 와인색으로 범벅이 된 닭고기 한 점이 혀에 닿자 강한 와인 향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고기 맛이 울컥 다가왔다. 닭고기는 아인슈타인의 실험실에서 극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처럼 부드러웠다. (아! 살면서 맺은 음식들의 기억의 총합이 ‘나’구나!) 걸쭉하게 졸인 코코뱅은 긴 세월 오랫동안 묵은 선배의 진한 우정 같았다. 선배 ㄱ은 ㅈ과 ㄴ이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모네 02-395-6030/코코뱅 2만원, 파스타 1만4000원 등)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