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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맛이 좋았을걸…

등록 2011-04-14 11:17

수육. 박미향 기자
수육.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되었다. ㅇ은 대학 1학년생이었다. 그는 바람 부는 종로거리로 달려가서 창당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쯤 교정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그가 선거운동을 뛴 선배가 과 학생회 회장으로 선출된 날이었다. 그는 축하연 장소가 적혀 있는 학생회로 신나게 달려갔다. 세상은 개인의 욕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밤 11시, 문과대는 굳게 잠겨 있었다. 손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문과대 옆 벽에 달린 긴 통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타잔이 따로 없었다. 양팔과 양다리를 벌려 땀을 뻘뻘 흘리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2층에 살짝 열린 문이 코앞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유인원과 닮아도 같을 수는 없다. 뚝! ㅇ은 떨어지고 말았다.

ㅇ과 나의 공통점은 술자리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알코올에 대한 과도한 애정, 흥건한 취기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다. 우리는 한잔 술에 ‘소오강호’ 노래를 외치는 인생들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품성 때문이다. 세속의 기준에 무심하고, 느리게 가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 그는 몇년 전 벤처회사를 창업한 선배의 ‘꼬드김’에 이직을 했다. 회사는 어려웠다. 그는 소위 인력시장에서 상종가였다. 실력과 겸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자존감이 탄탄한 사람이었다.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싫다”를 외쳤다. 선배에 대한 의리였다. 최근 그의 의리가 승리했다. 회사는 업계에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동안 고생한 그를 위해 보양식을 준비했다. 경복궁 뒤 ‘백송’은 30년이 넘는 집이다. 아늑한 한옥과 폭신한 방석, 구수한 수육(사진)과 설렁탕이 인기다. ‘백송’의 쇠고기수육에는 도가니, 꼬리, 우족, 살코기 등 여러 가지가 사골육수에 담겨 나온다. 수육은 고기를 푹 익혀 물을 뺀 것이다. 숙육이라고도 한다. ‘백송’은 ‘이문설렁탕’, ‘하동관’, ‘대성집’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집이다. 한 젓가락 뜨고 있는데, ㅇ이 한마디 한다. “앗, 보기 싫은 사람(의 사진)이 걸렸네. 술맛 떨어지는데요.” 그가 싫어하는 정치인의 사진이 방 한쪽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나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음식점은 맛만으로 승부할 수 없다. 수육의 국물은 졸아들고 있었지만 젓가락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광장시장의 맛 골목을 좋아하고 어색한 포크질보다는 낡고 휘어진 수저로 휘휘 젓는 국밥 한 그릇을 더 좋아하는 그를 어쩌자고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모셨을까!

“‘와비사비’를 갔어야 했는데….” 거기라면 더 흥겹게 한잔 술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와비사비는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근처에 있는 허름하고 소박한 일본식 선술집이다. 의자는 모서리가 부서지고 벽은 집수리가 덜 끝난 것처럼 어수룩하다. 이곳의 ‘명란밥’은 입안에서 폭죽이 터지듯 반짝거리는 맛을 선물한다. 짠 듯 단 젊음의 맛이다. 그날 그곳을 갔어야 했다. ㅇ, 미안하이!

‘와비사비’ / 02-338-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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