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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느긋하게, 불안해하지 말고

등록 2011-10-20 11:35

[esc] 박미향 기자의 ‘나랑 밥 먹을래요?’
여유에서 비롯되는 술맛처럼 끝없는 레드카펫 같은 인생에 초조함은 금물

만화 <술 한잔 인생 한입>(라즈웰 호소키 작)은 그림부터가 엉성하다. 엉뚱한 술꾼 이와마 소다츠(29)의 엉성한 술 이야기를 모은 일본 만화다. 이와마는 ‘해가 저물고 으스름달이 고개를 내미는 봄날 밤’ 선술집을 찾고, ‘된장을 볶는 느지막한 가을날 화로 곁에서’ 술상을 받고 ‘눈 내리는’ 아침에도 술잔을 기울인다. 평범한 샐러리맨 이와마는 일상의 철통같은 압박을 느긋한 표정과 술 한잔으로 퇴치한다. 이 만화의 매력은 페이지마다 도배질된 엉성한 느긋함이다.

주인공은 홀로 술 기차여행을 떠난다. 출발부터 맥주 한 캔을 따고 사케로 넘어간다. 안줏감으로 고른 마른오징어에 라이터를 들이대는 센스도 느긋하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면 도시락을 먹고, 옆자리 낯선 이가 말을 걸면 건배를 한다. 사케 캔이 창틀에 차곡차곡 쌓일 때쯤 잠이 들었다가 다시 그 기차를 타고 돌아온다. 주인공이 추천하는 술꾼들의 안주도, 맛있어야 한다는 압박은 없다. 부엌으로 달려가 바로 요리를 하고 싶어질 뿐이다. 그의 머위된장은 만들기도 간단하다. 머위를 뜯어 끓는 물에 2~3분 데치고 냉수에 잠시 담가 풋내를 뺀다. 물을 짜낸 뒤 칼로 다진 다음 설탕을 조금 넣은 된장과 잘 섞고 다시 칼로 다지면 된다. 살짝 씁쓰레한 맛이 술맛을 돋운다. 술안주로 꽁치 한 마리를 7가지 단계로 먹어치우는 장면에서는 느긋함이 어떤 경지에 오른 느낌이다.

이 만화를 읽는 동안 내내, 이 느긋함을 ㅅ과 ㅇ에게 선물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가망성 없는 노처녀라고 낙담하는 38살의 ㅅ과 노처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30살의 ㅇ에게. 중국집 ‘루이’ 마포점에서 여자들의 식탁은 풍성했다. ㅅ과 ㅇ의 인생도 마치 루이의 식탁처럼 풍성하면 좋으련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과 사랑에서 모두 승리하는 여성이 되길!’ 예부터 떠돌던 한 여성학자의 당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ㅅ과 ㅇ은 직장에서 인정받는 인재들이다. 심지어 선후배, 동료들의 사랑도 한 몸에 받는다. 그야말로 ‘일에서는 승리한 여성’들인 셈! 하지만 그놈의 ‘사랑’이 문제다. ㅅ은 하도 답답해 사주팔자 점괘를 봤다고 했다. 내년부터 남자들이 줄을 선다는 운명철학자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ㅇ은 “가슴이 떨리지 않고 만나면 도망갈 생각부터 드는 남자”와 3번 만났다. 남자는 첫눈에 ㅇ에게 반했다. ㅇ은 순박한 능력자인 그 남자를 아직 뿌리치지 않았다. 불안은 더 큰 불안을 몰고 오는 법. 작은 돌멩이가 눈 쌓인 언덕을 구르다 보면 덩치 큰 백곰처럼 변하는 것과 같다. 초절임을 만들 때 식초를 너무 쏟아부으면 불안하다. 도저히 인간의 혀와 코가 감당할 수 없는 시큼함이 재료를 점령하고 식재료의 본연의 기품 있는 맛을 강탈할까 큰 걱정에 휩싸인다. 이때 불안에 떨고만 있으면 초절임은 진짜 쓰레기가 된다. 다른 재료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인생은 장거리 마라톤이다. 같이 뜀박질할 사람을 고르는 일에 불안보다는 느긋함이 더 요긴한 재료다.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인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레드카펫인데! (루이 마포점 02-3274-1188. 중국요리 명인 여경옥 셰프가 연 루이 2호점)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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