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남자 잘못은 아니야

등록 2012-09-05 17:22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최소 3억 정도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부부간 싸움이 잦아지고 삶이 초라해진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미혼의 여자라면 한번쯤은 엄마로부터 들어봤을 그런 레퍼토리였다. 딸들 역시도 ‘그래도 사랑이 중요한 거 아니냐’, ‘사랑이 비즈니스냐’며 강하게 반발했을 터. 용감했던 그녀들은 꼭 그런 후 나에게 상담메일을 보내 ‘결혼은 사랑이냐 현실이냐’며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

나 역시도 대외적인 기본입장은 ‘사랑’파이기에 “독립적이거나 자신의 행복에 대한 가치기준이 확고하지 못하다면 아무래도 ‘돈’에 영향을 받겠죠” 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냉철함을 풍겨주되, “하지만 내 사랑은 남들과 다를 테니까” 같은 듣기 좋은 자부심을 교묘하게 던져주고 슬그머니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고는 뒷맛이 썩 개운치만은 않았다. 또다른 엄마 레퍼토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고작 3년이고 경제적 안정은 상상 이상으로 오래가. 부부는 경제공동체라고.”

‘로맨스도 필요하고 돈도 포기 못해’ 식으로 이것저것 다 원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식의 결혼과 그녀들이 그 후 펼치는 불평불만과 자기연민을 경멸하기는 쉽다. 그 모습을 참 많이 목격하며 나는 차라리 돈이든 사랑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여자가 시원시원하니 좋았다. 원하는 걸 정확히 알면 얻기가 더 쉽고 그러면 나름대로 만족하고 살 테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원하는 것이 바뀌기도 했다.

대개 바뀌는 쪽은 ‘사랑’을 택했던 여자들이었다. 돈을 선택한 여자들이 자신이 놓친 사랑을 뒤늦게 갈구하는 경우는 별로 못 봤다. 반면 사랑에 모든 걸 던진 여자들은 살아보니 사랑이 다는 아니더라, 남자가 착하고 성실하고 나만 사랑해주는 게 다가 아니더라, 아니 남자가 조금이라도 덜 착하고 덜 성실해지고 나를 덜 사랑하게 되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 비해 삶의 수준이 떨어진 것을 언제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묵인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서 갈라서기보다 사랑이 식어서 갈라서는 것이다.

역시나 현실의 문제는 무겁고 감정은 사사로움인가? 막말로 역시 돈이냐, 응? 다시 말하지만 대외적으로 ‘사랑’파인 나는 이 지점을 인정하기가 참 고깝다. 깊이 고민할수록 돈이냐 사랑이냐의 이분법도 부질없거나 애매했다. 하여 자체적으로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사랑’파들에겐 마음이 서글퍼지고 초라해지고 두려워지는 이 문제는 차라리 ‘가치관’의 문제라기보다 ‘성향’의 문제라고. 즉 똑같이 ‘사랑’을 택해도 폭풍우처럼 휘몰아친 사랑에 플러스의 정점을 찍어봤다면 그 폭발력만큼이나 역으로 실망감의 마이너스 정점으로 곤두박질하기 쉽지 않을까. 넘쳐흐르는 에너지의 문제라면, 그 에너지가 이젠 그 남자가 아닌 자신에게 향하게 하면 될 노릇. 남자는 당신을 사랑한 것 말고는 아무 죄 없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