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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여자, 너라는 남자

등록 2013-05-15 17:58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있잖아, 한겨레에서 칼럼 연재하자는데….” 십오개월 전, 곁의 남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어, 잘됐네. 주제가 뭔데?” “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사랑한 남자들’ 어때?”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좀 곤란할까? 곤란하겠지?” 나는 바짝 쫄았다. 역시 아내가 과거 연애사를 신문지면에 연속적으로 싣는 건 남편에겐 부대끼겠지. 그런데 웬걸.

“바보야, ‘내가 사랑한 남자들’이라고 주제를 잡으면 그거 얼마나 쓰겠어? 쓸 수 있는 얘기에 한계가 있다구. 내가 사랑한 남자만 아니라 미워하거나 인상적이었다거나 다양하게 커버해야 반년이라도 버티지. 참, 난 네가 뭘 쓰든 상관없고, 다만 내 얘기만은 쓰지 마. 이런 데다가 남편 얘기 쓰면서 ‘역시 남편을 사랑하네 어쩌네’ 그러는 거 촌스럽거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사랑한 남자들’로도 반년은 족히 쓸 수 있었지만 그의 조언을 따라 1년을 훌쩍 넘겼다.

주변의 아저씨들은 곧잘 ‘남자들’ 칼럼을 보고 남편이 뭐라 하지 않더냐며 남의 집 가정을 걱정해주셨다. 아마도 읽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그럴 리 없다. 안 읽는 척하면서 다 읽었을 것’이라며 그들은 눈알을 굴렸다. 어쩌라고. 남편은 격주로 esc 섹션이 끼워져 올 때마다 신문 중 그 부분만 쏙 빼서 손도 안 댄 듯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다. ‘안 읽고 있다’를 어필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예전에 집 밖에서 연하의 일러스트레이터 남자와 작업실을 1년간 같이 썼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도 주변 아저씨들이 ‘괜찮겠어?’ 하며 걱정해줬다. 그 걱정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가 작업실을 뺄 때, 차에 짐을 실어 나르는 남편의 몸놀림과 표정이 유난히 가벼운 걸 보고 아아, 이게 그런 거였구나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1년쯤이 모든 형태의 외도를 버텨낼 수 있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봄이라 그런지 부쩍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최적화된 상대란 없다. 13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이 세상엔 내 남자, 내 여자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람을 소유할 수 없고,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끊임없이 같은 깊이로 사랑할 수도 없다. 그와 내가 드물게 같이 좋아하는 더 비치보이스의 노래 ‘갓 온리 노스’(God Only Knows)는 가사에선 ‘어떤 경우가 생겨도 너를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못할지도 몰라’ ‘만약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다 해도 인생은 계속되겠지’라는 리얼리즘적 보류조항을 달고 있는데, 정말 만약 당신이 내 곁을 떠난다 해도 인생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인생은 계속 가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에게 얽힌 진정한 슬픔과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끝내 각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때를 서로의 곁에 머무는 것이다. <끝>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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