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말 통하는 남자

등록 2013-02-20 17:43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남녀 사이란 화성과 금성의 거리만큼 원래 말이 안 통하는 사이라고는 했다지만, 나만 해도 좋아하는 남자와 같이 있으면서도 참 즐겁지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남자 너무 좋아하나 봐’라는 울렁거림 하나로 지탱하며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했으니 즐거울 리가 없었지만 좋은 게 죄인지라 그 정도의 ‘즐겁지 않음’은 당연한 걸로 감수했다. 그 이상을 바라면 죄가 되고 그 남자가 떠날까 봐 무서워서.

뒤늦게 대화가 너무 즐거운 남자와도 연애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할 말이 끝없이 넘치고 내가 하는 말이 무엇 하나 비껴가지 않고 상대에게 쫙쫙 흡수되는 그 시원한 분출의 느낌. 왜 전 남자들은 말이 엇나가고 오해도 하고 일부는 아예 흘려들었을까? 즐겁지 않은 것을 즐겁지 않다고 알아차리면서 나는 눈을 조금씩 떠갔다. 대화와 소통의 쾌감이 없으면 관계도 오래 못 갔다. 본래 언어능력은 섹스능력과 통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다가 대화가 단순히 시원시원 잘 통하기만 하는 것도 싱거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자기 속내를 말하면 자신의 약한 모습이 드러날까 겁내는 그런 남자들을 만나다 보면 이런 솔직하고 따뜻한 시원시원함이 감사하지만, 내 욕심이 너무 간사해서인지 남녀간의 소통에는 말 그대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은밀하고 모호한 ‘불통’의 요소도 적절히 섞이길 바랐다. 안심하고 그 무슨 말이라도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관계는 근사하지만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일까 상상하는 그 틈 사이로 에로스가 흐를 것만 같아서. 에휴.

하지만 급기야는 그런 것도 다 필요 없게 되었다. 남자의 대화력이 어떻든 어느덧 내가 남자와 제법 대화를 잘하는 여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밑밥을 깔아놓은 건 나인데 대부분의 상대 남자들은 나와 말이 잘 통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갈 때도 많다. 그럴 때 유일하게 내게 허락되는 판단 기준은 남자들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의 어디가 좋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그가 나와 ‘통’했는지를 알려주었다. “너 아니면 안 돼”라고 매달리던 남자에게 그 질문을 했을 때 가령 그가 “네가 예뻐서”라고 대답했다면 나보다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내가 아니어도 될 수’ 있다. 세상의 연인관계에선 의외로 ‘굳이 너 아니어도 되지만, 일단은 지금 내 앞에 네가 있으니깐’ 같은 ‘와이 낫?’적인 관계가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언젠가는 대체 가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 슬픈 일은 없다. 게다가 어떤 이유들은 ‘넌 대체 나의 뭘 보고 있던 거야’ 싶어 실망스럽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 상대의 ‘난 너의 이런 점이 좋아’가 내 마음 정중앙 과녁에 화살처럼 박혀버릴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깊이 지켜봤음을 시사하는 그 ‘좋은 이유’가 나는 그 어떤 다른 여자로도 대체 불가능함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