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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장의 재난대비용 비상식량

등록 2013-04-17 18:36

이기원 제공
이기원 제공
[매거진 esc]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전쟁’이라는 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티브이에서 6·25나 이산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올 때면 잠깐 시선이 머물다 금방 채널이 돌아가곤 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 북한은 이를테면 존재는 알고 있으나 실감은 없는, 고대 유적 같았다.

아마 혼자 살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미사일 위협이 코앞에 있다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는 얘기가 좀 달라졌다. 최악의 경우를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됐다. 때마침 북한이 동해 쪽으로 미사일을 배치했으며, 미국 시민권자인 누군가는 미국 정부로부터 한국에서 당장 대피하라는 메일을 받았다는 말도 들렸다.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역시 비상식량 확보였다.

통조림이나 라면 같은 것들이 먼저 생각났지만 문득 머리를 스친 건 군대에서 먹었던 전투식량이다. 전투식량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거부감, 힘든 훈련 뒤여서인지 꽤 먹을 만했던 맛의 기억, 방부제를 워낙 많이 넣어 유통기한이 2~3년은 된다고 했던 하사관의 말 같은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실용적으로, 혹은 재미를 위해서 한 번쯤 구입해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국방부 마크가 찍혀 있는 진짜 전투식량을 구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한때 광장시장 같은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미군 야전식량 엠아르이(MRE) 역시 지금은 찾기 어려웠다.

아쉬운 대로 전투식량(과 비슷한 제품)을 파는 사이트를 찾았다. 전투식량이라는 말보다는 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아웃도어용 비상식품 정도로 지칭하는 것이 더 옳아 보였다. 꽤나 제품의 종류가 많았다. 발열제가 동봉돼 뜨겁게 먹을 수 있는 3분카레류의 제품들도 있었고, 미군들을 위한 초코바 형식의 열량 위주 제품도 있었다. 오염된 물에 넣으면 식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발포 타입의 정수제까지 판매하는 건 조금 놀랍기도 했다.

그 모든 제품을 다 구입할 수는 없어서 우선 전투식량의 원형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비빔밥류 제품 5종을 구입했다. 오래전 군대에서 먹었던 건 이미 가공된 볶음밥 형태였지만 이 제품은 그것과는 좀 달랐다. 반건조시킨 쌀이 들어 있고, 그 안에 분말수프, 참기름이 들어 있었다. 뜨거운 물은 10분, 차가운 물도 40분 정도 넣어두면 먹을 수 있는 형태다. 중요한 건 비상시에 휴대와 식용이 가능한가 하는 점인데 거기에는 합격점을 줄 만했다. 이 제품 하나의 무게는 115g. 여기에 물만 부으면 되니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기에는 꽤 실용적으로 보였다.

물을 넣어 불린 밥에 수프를 넣고 비볐다. 보기에도 썩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말 그대로 밥에 라면 수프를 넣어 먹는, 딱 그 느낌이었다. 나처럼 엠에스지(MSG)에 익숙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을 테고, 맛에 예민하거나 생식을 즐겨 먹던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거북할 맛이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어떻게든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됐다(맛은 썩 나쁘지 않았는데, 먹고 나니 분말 소스 덕분에 속이 좀 부글거리긴 했다).

이 글을 쓰고 난 뒤에는 발포형 정수제와 좀더 맛있다는 발열 도시락도 사볼 생각이다. 여전히 위험은 도사리고 있으니까. 이 와중에도 ‘좀더 맛있는 비상식량’을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우습긴 하다.

이기원 <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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