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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를 위하여

등록 2014-02-19 19:47수정 2014-02-20 13:58

일러스트레이션 박지훈
일러스트레이션 박지훈
[매거진 esc]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덴마크 코펜하겐 동물원이 18개월 된 수컷 기린 ‘마리우스’를 총살 해체해 사자 먹이로 던져 준 사건이 화제다. 열성 종자 방지 위해 유사 유전자를 가진 잉여 기린은 살처분하는 유럽동물원수족관협회 규정에 따른, 전 과정을 일반 공개했다. 격리 또는 거세 의견도 있었으나 과연 도살에 견줘 더 나은 짓인지 따지는 반론을 이기지 못했고, 동물보호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막지 못했다. 곳곳의 입양 제안도 ‘빈자리는 더 적절한 유전자를 가진 기린이 차지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동물원 주장은 억지, 인도적 차원으로 좋은 보금자리로 데려와 잘 보살피겠다”고 말한 체첸 대통령 람잔 카디로프는 개인 동물원을 보유한 동물애호가인 동시에 고문과 암살 그리고 무자비한 진압으로 유명한 인물, 미묘한 상징적 역설. 사살 후 동물원은 “불가피한 조처였고, 아이들에게 기린의 해부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었음이 자랑스럽다”는 입장을 밝혔고, 그 뒤 관계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여기서도 꽤 요란했다. ‘북유럽 좌빨의 참교육 실상’ 운운은 일언 대꾸의 가치조차 없으니 무시하더라도, 주로 덴마크 교육 철학을 욕하는 성토. 어째서 그런 끔찍한 장면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나? 덴마크 부모들은 도대체 생각이 있나 없나? 덴마크는 의무교육이 가장 먼저 제도화되었고 자유학교 대안교육이 전체의 2할에 이르는, 시쳇말로 교육 선진국. 그러니 생각, 아마도 꽤나 많았을 거다. 나는 마리우스 사건에 그 나라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화끈한 화두가 떠올랐다. “오직 어려움만이 고상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나니, 모름지기 문제란 좀 어려워야겠지?” 그는 인간의 행복이란 착각일 뿐이니 결국 모두 절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분류학자처럼 절망을 성질과 종류에 따라 나눈다. 가장 위험하고 저급한 절망은 스스로 절망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니, 부유하고 안락하게 꾸민 겉치레 일상이 곧 인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지만 그런 인위적 가짜 행복이야말로 가장 저급한 절망이 쉽게 싹트는 곳이라는 살벌한 통찰. 절망에 빠진 채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자와 절망을 똑바로 쳐다보는 자의 차이. 그러고 보니 옳든 그르든 어쨌든 죽은 기린 앞에 선 아이들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우아했다. 기린처럼. 그 또래 아이의 그토록 진지한 눈빛, 지금껏 본 적 없다.

동물원이 원죄, 이미 지옥이다. 가족동물원이란 게 있다. 명목은 동물과 인간이 가까이 어울리는 곳. 오랑우탄이 사람 옷을 입고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 논다? 사람보다 힘이 세지면 오랑우탄 앞발 인대를 자른다. 물까 봐 일부러 빼는 건지 때려서 깨진 건지 이빨이 없다. 문제시되면 죽여 박제한다. 비좁고 더러운 시설, 고통을 악용한 훈련, 생태에 위배된 활동, 부적절한 수의학 처치 등의 작태를 보면 분노를 넘어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울 지경. 그런데도 주말마다 성황이다. 왜? 어쨌든 총 맞아 죽은 기린은 없으니까. 내 아이에게는 추하고 잔인한 것 말고 예쁘고 착한 것만 보여 주고 싶어? 그럼 가족동물원이 적절한 해법이지. 역시 ‘감출 것’에 해당하는 가난한 노인이 홀로 굶고 얼어 죽은 지 몇 달이 지나고서야 발견된 뉴스가 이제 놀랍지도 않은 나라에서는, 그따위가 정답이다. 현실은 대체로 해롭다.

박지훈 소프트웨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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