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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몇 살 같아요?

등록 2017-05-11 08:41수정 2017-05-11 11:15

어른 아닌 어른, 71살의 청춘 윤여정을 만나다
지난달 25일, 가회동의 한 한식당. 배우 윤여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패션사진가 김상곤
지난달 25일, 가회동의 한 한식당. 배우 윤여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패션사진가 김상곤

배우 윤여정은 정말이지 식당에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이 식당을 개업하는 리얼리티 예능을 만드는 피디라고 가정해보라. 음식을 푸짐하고 맛깔나게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해야 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식당의 주인이자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 노년의 배우 중 누구를 캐스팅하겠는가. 당신은 한국의 대표적인 엠에스지(MSG) 광고를 독식했던 두 명의 배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윤여정은 아니다. 일단, 누구도 윤여정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서서 가족을 위해 밥을 하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상상하지는 못할 테니까.

윤여정은 고전적인 의미로 미디어가 소비하는 ‘엄마’는 아니다. 그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다. 물론 윤여정에게는 많은 엄마 역할이 떨어졌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작별>, <거짓말>, <네 멋대로 해라>에서도 그는 엄마였다.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로는 생전 처음 ‘국민 할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엄마로 기억하지 않는다. 엄마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는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엄마로부터 멀어진다. 다 큰 당신이 징징거리며 엄마를 찾는다면 윤여정은 당신의 옷장에서 꺼낸 스키니진과 스니커즈를 신고 ‘그만 징징거리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한마디 툭 내뱉을지도 모른다. 타박하지도 야단치지도 않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건 꽤 놀라운 일이다. 71살의 여배우로 활동하면서 ‘엄마’나 ‘할머니’의 이미지를 유행 지난 모피코트처럼 걸치지 않고 한국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도통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윤여정은 그렇게 드문 생존의 증거를 2016년에 가장 근사하게 증명했다. 그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들 속에서 도무지 그 나이의 여배우가 해내지 못한 경지의 날을 보여줬지만 몸 파는 ‘박카스 할머니’로 등장한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정말이지 죽여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죽여주는 여자>가 생의 마지막 절벽에 서서 낭떠러지 같은 시대를 바라보는 영화라는 것이다. 여기에 원망의 기색은 없다. 윤여정은 비극으로 추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흐트러짐 없이 고고하게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품는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이.

영화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죽여주는 여자?> 포스터. <한겨레> 자료사진

티브이엔(tvN)의 <윤식당>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티브이엔(tvN)의 <윤식당>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그런 점에서 윤여정이 <죽여주는 여자>를 하고 나영석 피디의 예능을 한 것은 전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티브이엔(tvN)의 <윤식당>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미디어가 제시하는 노인과 엄마의 방식으로 우리를 ‘힐링’하려들지 않는다. 대신 윤여정은 일한다. 열심히 일한다. 돈을 벌어 식당을 계속 하기 위한 직업인의 동력으로 일한다. 바로 그 덕분에 <윤식당>은 일하는 우리들에게 존경할 만한 어른의 품위를 보여준다. 우리는 윤여정을 엄마로서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곁에 두고 싶고, 그런 노인으로 늙고 싶다. 나영석도 그 사실을 어쩌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너구리 같은 이 남자가 식당이라는 콘셉트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윤여정을 캐스팅한 뒤 ‘윤’식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윤여정을 지금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체 시청률 16%를 경신하고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에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윤식당’ 현상의 중심에는 분명히 윤여정이 있다. 예능이라는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에게 인생의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다른 어른’ 윤여정.

김도훈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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