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소제동 대창이용원 이발사 이종완(80)씨의 이발 모습.
‘한달이 즐거우려면 이발을 하고, 하루가 즐거우려면 면도를 하라.’ 예전부터 남성들 사이에서 떠도는 얘기다.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하게 하면 삶이 즐거워진다는 말이다. 바쁘고 고단한 현대인의 삶을 이발을 통해 즐겁게 이끌어준 이발소와 이발사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발소 추억부터 들춰보자. 늘어진 주렴을 헤치고 들어서면, 먼저 은은한 비누 냄새가 풍겨온다. 잡지나 만화책 하나 집어들고 나무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한 가운데 낡은 벽걸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른하다(겨울이라면 연탄난로에서 주전자 물이 끓고, 빨랫줄에 걸린 낡고 닳은 수건들은 까슬까슬하게 말라 있을 것이다). 벽에는 유명한 ‘이발소 그림’들이 걸렸다. 아기 돼지들에게 젖을 물린 채 흡족해하는 엄마 돼지 그림, 보름달 밤 대숲을 헤치고 나오는 호랑이 그림, 밀레의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리고 ‘천객만래(千客萬來)’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들….
서울 성우이용원의 가위, 바리캉, 빗, 면도칼.
차례가 되면 윗옷을 벗어 벽의 못에 건다. 높고 크고 낡은 가죽의자에 몸을 싣는다. 갑자기 뒷목에 서늘한 금속 바리캉의 감촉이 느껴진다. 가끔 머리카락이 집혀도 참아야 한다. 이어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눕는다. 다리를 뻗어 받침대에 올리는 맛이 각별하다. 차가운 비누거품 솔이 턱과 목을 훑고 지나간 다음, 목덜미가 섬뜩하도록 날 선 면도칼이 피부를 긁는다. 슥슥삭삭…. 입술도 들추고 콧구멍도 들춘다. 칼날이 귓불과 목덜미를 지날 때는 얼굴이 야릇하게 달아오른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졸음이 밀려온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견디려다 깜빡 졸았을까. ‘자, 머리 감으세요.’ 타일 세발대(세면대)에 웅크려 앉으면,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며 벅벅벅 머리를 감겨준다. 이발사는 수건을 양손으로 잡고 머리카락을 턴 뒤 드라이어를 들이대며 덕담을 한다. ‘어이쿠, 미남 되셨네.’ 오래된 빈말도 기분 좋게 들려오는 곳이 이발소다.
대창이용원 이종완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이용원, 이용소, 이용센터, 이발관, 이발소…. 미용실 머리 손질에 익숙해진 젊은 남성들에겐 이미 멀게 느껴지는 이름일 수 있다. 어릴적 스포츠머리·상고머리 깎던 추억으로나 남아 있지 않을까. 아니면 ‘퇴폐’라는 단어와 한묶음으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미용실에 고객 빼앗기고, ‘퇴폐’ 오명까지 덮어쓴 채 이발소는 이제 그 이름마저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이발소(理髮所)는 말 그대로 ‘머리를 다듬고 정리하는 곳’이다.
유럽에선 일찍부터 이발소가 간단한 외과수술을 겸하는 병원의 형태로 발달해왔다고 한다. 한국에선 머리카락은 몸과 함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 해서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짧게 깎게 된 것은 1895년 단발령 선포 이후다. 이때부터 서구식 이발이 시작돼, 일본 유학생 등을 통해 확산됐다.
1960~70년대엔 여성 면도사를 따로 두는 이발소가 인기를 끌었고, 남성 머리 스타일도 다양해지며 이발소 전성시대를 누렸다. 1980년대 들어 이발소들은 학생 두발 자유화에다 미용실(미장원)에서 머리를 깎는 남성이 늘어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밀실을 만들어놓고 성매매를 하는 퇴폐 이발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남성 멋내기 공간으로서의 이발소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퇴폐 이발소의 성행은 정상적인 일반 이발소들을 ‘모범 이발관’으로 부르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이발소 회전간판(사인볼) 아래, 퇴폐업소와 모범업소가 전국에 공존하고 있다.
전통 이발소 수는 꾸준히 줄어드는 모습이다. 1999년 2만7000여곳에 이르던 전국 이발소가 2016년엔 2만300곳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발기구·재료상도 감소했다. 대표적인 이·미용 기구 상가인 서울 을지로5가 중부시장엔 1990년대 말까지 7곳의 기구·재료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3곳뿐이다. 전국에 4곳이던 이발의자 전문 생산업체도 1곳만 남았고, 이발소 회전간판 공장도 5곳에서 1곳이 됐다.
이런 가운데 남성 이발업계엔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10여년 전부터 저렴한 남성 전용 미용실 체인이 생겨나 인기를 끌더니, 최근엔 고품격 남성 이·미용 공간임을 내세운 ‘바버숍’이 크게 느는 추세다. 이른바 ‘욜로족’ 등을 겨냥해, 기존 이발소와는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고가에 제공하는 곳들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전통의 이발소는 여전히 우리 곁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살아있다. 평생을 바리캉과 면도칼·가위 들고 고객을 맞아온 이발의 달인, 면도의 백전노장들이 전국 대·소도시 골목마다 건재하다. 이들이 수십년 단골을 거느릴 수 있는 힘은 이발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에서 나온다.
“내 가위 기술은 아무도 못 따라올걸. 평생 가위질하며 터득한 솎아내는 기술이지.”(서울 공덕동 성우이용원 이남열씨·69·경력 47년)
“걍 머리 모양 딱 보면 아는겨. 오래 허다 보니께 워치게 깎아얄지 다 보이는구먼.”(대전 소제동 대창이용원 이종완씨·80·경력 60년)
성우이용원은 1927년부터 같은 자리에서 3대째 대를 이어 영업 중인 이발소다. 고색창연한 이발소 건물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남열씨는 140년, 100년 된 독일제 쌍둥이표 면도칼, 57년 된 바리캉, 54년 된 가위 등을 물려받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압권은 이발을 처음 배울 때부터 쓰고 있다는 빗이다. 금방이라도 빗살이 와르르 떨어져 나갈 듯한 플라스틱 빗을, 쇠막대 끼우고 접착제로 붙여서 아직 쓰고 있다. 이씨는 최근 건강 문제로 한 달여간 문을 닫았다가, 7월초 다시 이발소 문을 열었다.
대전의 대창이용원은 60년대 후반 미장원이 있던 집에 문을 연 이발소다. 80여년 된 건물에서 옛날 방식대로 이발 손님을 맞고 있다.
서울 성북동 새이용원의 할머니 이발사 이덕훈(82)씨.
서울 성북동 새이용원의 이덕훈(82)씨도 자부심 넘치는 이발사다. 이씨는 1958년 이발사(이용사) 면허시험에 합격한 우리나라 첫 여성 이발사다. “이발사였던 아버지한테서 19살 때부터 이발을 배웠거든. 면허시험을 69명이 봐서 31명이 합격했는데 여자는 나 하나뿐이야.”
이발 경력 64년째인 이 할머니는 요즘도 매일(화요일 휴무) 이발소 문을 연다. “한 손님이 나보고 그러데. ‘구름에 달 가듯이’ 머리를 깎는다고.” 부드럽고도 거침없는 이발 기술을 칭찬하는 말이다. 매우 좁고 후줄근한 이발소지만 80~90살 어르신 단골이 수두룩하고, 가끔씩 호기심에 찾아오는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해가고 새로 떠오르는 것만이 주목받는 시대. 자부심 하나로 오래 묵은 것들을 지켜가는 분들의 마음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바버숍(BARBER SHOP)
이발소의 현대적 개념. 과거와 달리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세련된 서비스가 특징. 커트, 파마, 염색은 물론 면도 서비스까지 남성 헤어스타일에 특화된 곳. 향수, 화장품, 옷, 신발 등을 갖추고 남성 토털 스타일숍을 지향하는 곳도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