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상 9단의 흑돌백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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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상 9단의 흑돌백돌 / “바둑은 슬픈 드라마 ….” 196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구가하며, 64차례나 타이틀을 차지했던 일본의 전설적인 기사 사카타 에이오가 내린 바둑의 정의다. 51년 31살의 나이로 일본 최고 기전이던 본인방(7번기) 도전자가 돼 3 대 1로 앞서나가다 3연패해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다시 도전하기까지 10년이 흘렀고, 41살이 되어서야 본인방전에 재도전해 타이틀을 따내고 일인자로 올라섰다. 10년 동안 각고의 노력, 집념, 끈기로 꿈을 이뤄낸 그는 이후 1964년 30승2패와 7관왕, 본인방전 7연속 우승 등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그런 그가 ‘바둑은 슬픈 드라마’라고 했으니 …. 하지만 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바둑을 이겼을 때의 기쁨이 1이라면 바둑을 패했을 때의 아픔은 10 정도 되는 것 같다. 짧은 바둑 인생을 돌아보아도, 이겨서 기뻤던 기억보다는 졌을 때의 아픔이 많이 떠오른다. 바둑리그에서 이세돌 9단에게 대착각으로 역전패를 당한 뒤 화장실로 직행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흘렸고, 기성전에서 백홍석 7단에게 패하고 왕십리 한국기원에서 상계동 집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동료 기사들이 패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가슴 아프다. 2002년 대전 유성에서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16강이 벌어졌고, 한국의 박영훈 9단(당시 3단)과 중국의 차오다위안(조대원) 9단이 맞붙었다. 당시 영훈이는 한국에서 이미 천원전을 우승하는 등 신예군의 선두주자였고, 차오다위안은 80~90년대 중국의 4위권 실력자였다. 동료 기사들은 영훈이의 승리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결과는 차오다위안의 승리였다. 둘이 숙소로 걸어가는데 영훈이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바둑을 이기든 지든 항상 밝은 모습만 보이던 영훈이었기에 적잖이 놀랐다. 어린 시절, 이세돌 9단과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 떠오른다. 92년 문화체육부장관배 어린이바둑대회였다. 당시 2학년이던 나는 32강에서 탈락했고, “그 정도로도 선전”이라는 지도 사범님의 말씀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떨어졌지만 대회를 구경하며 기웃대던 나에게 포착된 이가 바로 한 살 위의 세돌이 형이었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바둑은 매우 강했고, 전국의 수많은 소년 고수들을 제압하며 결승까지 진출한 끝에 하호정(현 프로 3단) 누나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2등이지만 3학년으로서 전국의 고학년들을 모두 누르고 준우승을 거둔 세돌이 형이 나는 부러웠다. 그런데, 정작 형은 밥도 굶은 채 어머니 품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세돌이 형의 강한 승부욕이 한국 바둑 일인자의 초석이 된 것 같다. 1이라는 승리의 기쁨과 10이라는 패배의 아픔. 하지만 10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쟁취해내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1을 위해 오늘도 바둑판에 모든 걸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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