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사례를 보면 멧돼지로 인한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은 매우 드물다. 감염이 확인된 접경지역 멧돼지 관리는 필요하지만, 그와 무관한 지역에서 덩달아 멧돼지 퇴치에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가 검출된 멧돼지 사체가 경기·강원 등 접경지대에서만 발견되고, 멧돼지가 돼지열병을 전파한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확진 지역과 동떨어진 경북·충북 등 일부 지자체에서 과도한 포획이 이뤄지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중앙사고수습본부는 2일 지난 10월 15일부터 경기·강원 접경지역의 멧돼지에 대한 전면 포획이 시작된 이래 전국에서 잡아 죽인 멧돼지는 11월 20일까지 모두 2만1209마리로 집계했다. 가장 많은 멧돼지를 잡은 지역은 경북도로 전체의 26.7%인 5660마리를 포획했다.
이는 바이러스가 검출돼 집중포획이 진행되는 강원도 4775마리(22.5%)나 경기도 2604마리(12.3%)보다 큰 수치다. 충북도도 3347마리(15.8%)로, 충북과 경북이 전국 멧돼지의 42.5%를 잡은 셈이다. 이들 지역은 애초 멧돼지 서식지가 넓은 자연 여건 때문에 기존 멧돼지 개체수 조절 수가 많았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 사태를 이유로 더욱 포획이 늘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발병 지점과 확진된 멧돼지 폐사체 발견 지점은 모두 접경지대 인근이다. 환경부 제공.
특히 경북 지역은 올해 들어 10월 14일까지 1만232마리를 잡아 전국의 19.9%를 차지했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문제가 된 뒤 그 비중이 26.7%로 급증했다. 경북도는 환경부가 멧돼지 포획 포상금을 마리당 20만원씩 직접 국비로 지원하기로 하자 “야생 멧돼지! 포획 신고하고 포상금 받아가세요!”란 보도자료를 내며 포획을 적극적으로 독려해, 대구지방환경청이 확보한 포상금 예산 7억6000만원을 훨씬 웃도는 포획 실적을 올렸다.
충북도도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예방한다는 명목 아래 도지사의 특별지시로 132명으로 구성된 ‘상설 포획단’을 꾸려 “도내 서식 멧돼지의 50% 포획을 목표”로 멧돼지를 잡아내고 있다.
이런 ‘멧돼지 퇴치’ 분위기에 대해 야생동물 전문가들은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막기는커녕 멧돼지의 행동권을 넓혀 역효과가 우려되고, 생태적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강원도 철원 민통선 이북 지역에서 발견된 멧돼지 가족. ‘씨를 말리는’ 식의 포획은 지역적 유전 다양성을 낮추고 멧돼지의 확산을 부채질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합뉴스
이우신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설훈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 주최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발병 원인과 전파경로가 밝혀지지 않았고 멧돼지의 감염이 접경지역 근처에서만 확인된 상태”라며 “경기도와 강원도 이남 지역에서 1만 마리 가까운 집단포획이 이뤄졌는데도 바이러스가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은 멧돼지 관리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러시아의 사례를 보면 바이러스 전파는 멧돼지에 의한 감염이 1.4%에 그치고 대부분 인간활동에 의한 것”이라며 “전면 포획은 멧돼지 개체군을 큰 압력으로 작용해 행동권을 확장하고 분산을 유도해 오히려 바이러스 억제를 가로막는다”고 말했다. 그는 “멧돼지는 우리나라에서 생태적으로 중요한 종이어서 지역적 과다 포획은 유전적 다양성을 감소시킨다”며 “포획을 하더라도 지역별 적정 밀도를 산출해 그 이하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한상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는 유럽 식품안전국(EFSA)의 2017년 보고서를 인용해 유럽에서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발생 원인은 감염된 가축이나 축산물의 이동(38%)과 잔반 급여(34%)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감염된 멧돼지와 접촉에 의한 것은 2%에 그쳤다고 밝혔다.
경기도 적성면 율포리 국도변에 설치된 멧돼지 차단벽의 모습. 환경부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1일 경기도 파주에서 발견된 12번째를 포함해 전체적으로는 34구의 멧돼지 사체에서 바이러스가 확진됐지만, 감염된 멧돼지가 다른 사육농가로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증거는 없다. 환경부의 한 전문가는 “1차 발생 농장 주변에는 멧돼지가 거의 분포하지 않았고, 감염된 멧돼지에서 증상이 나타난 뒤 폐사하기까지 2∼10일로 짧은데 1·2차 발생농가 주변에서 폐사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감염된 멧돼지가 발견되는 감염 위험지역에 차단 철책을 설치하고, 발생·완충 지역에서는 멧돼지 이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기포획 대신 포획틀을 설치하며, 광범위하게 설정된 경계지역과 차단지역에서는 멧돼지 전면 제거를 목표로 10월 15일부터 집중포획을 하고 있다.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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