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테릴이 쓴 <마오쩌둥전>.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생전 마오는 그렇게 읊었건만
천안문 초상화 앞 인파는 ‘어제’를 본다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 중국인들은 왜 마오를 품는가
거대한 중국의 신체에 스며든 작은 영웅 세번의 마오 열풍 거
천안문 초상화 앞 인파는 ‘어제’를 본다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 중국인들은 왜 마오를 품는가
거대한 중국의 신체에 스며든 작은 영웅 세번의 마오 열풍 거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②
웬지 모르게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러보게 되는 곳이 천안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마오쩌뚱(이하 마오로 칭한다)의 초상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지 천안문의 마오 초상 앞에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를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듯이 대동란 속에 빠뜨리기도 했던 마오. 일평생 투쟁을 좋아해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인간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더더욱 무궁하다”고 설파했던 그가 저렇게 변함없이 고요히 천안문에 수십 년에 걸려 있는 것이 ‘달나라의 장난’ 같기도 하다.
“마오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주변에 있는 아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저는 우선 능력이 대단하고, 사상이 있으며, 그리고 문학적 재능이 빼어났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론 말년에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공적이 많지요.“라는 예의 상투적인 평가. 마오에 대해 관심이 있냐는 질문에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리라.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사범학교 출신의 일개 반지식인(半知識人)이었던 그가 혁명에 뛰어든 지 불과 20여년 만에 그 거대한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했으니 그는 참으로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마오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마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처음으로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하기도 하고, “뒤집어엎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造反有理)”라는 반항의 철학을 일생 견지했으니 그에겐 남과 다른 확실한 사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애석하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화가 조금 부족했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詩才)가 조금 무뎠더라. 일세의 영웅 징기스칸도 다만 활쏘기만 잘하였을 뿐.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는 마오의 시가 언론에 실리자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일개 무장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손오공처럼 천하를 쥐락펴락
그렇지만 그야말로 이 모두가 지나간 일이 아닌가. 지금은 개혁 개방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가는,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의 시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왜 마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하긴 부시도 마오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마오의 전기를 읽고 동독 출신의 독일 총리에게 추천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말이다. 최근엔 그 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바야흐로 마오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르곤 하는 서점에서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그에 관한 책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이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혀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아큐’ 같이 생긴 분이 진지하게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감탄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에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일본 관련 서적이 하나의 코너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동북아 정세의 미묘한 변화 등으로 중국사회는 전에 없이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또 한 가지는 붉은 표지의 마오의 전기가 당당히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실. 이 책은 현재 하버드대학 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호주계 미국인인 로스 테릴이라는 사람이 쓴 전기였다. 이건 중국인민대학 출판부에서 마오에 관한 외국의 유명 연구서를 총서의 형태로 펴낸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베스트셀러를 겨냥해서 기획 출판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5만부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원래 1980년에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는 이미 1989년에 허베이 인민출판사에서 번역되어 12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 새롭게 뜬 책은 마오 이후 진행된 중국과 세계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마오에 관한 자료를 반영한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개정판(1999)을 새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미 120만부나 팔린 책이 다시금 출판되고 또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5만부 넘게 팔린 일은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로스 테릴은 이 책에서 마오를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질(猿氣)을 동시에 지닌 매우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마오는 한때 그의 아내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에겐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운(猿氣)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호랑이의 기운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호방하고 장중한 기세로, 원숭이의 기운을 B 지점에 도달하려는 원망(願望)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태도로 해석, 마오를 모순으로 가득한 아주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마오는 어릴 적부터 <서유기>를 좋아했고 손오공을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이 책이 중국의 독서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오의 열기가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오 전기 개정판 또 베스트셀러
돌이켜보면 마오 사후에 세 번의 마오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86년에 열기가 일기 시작하여 88년에는 상당한 기세를 이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79년에 번역된 스튜어트 슈람이 쓴 <마오쩌뚱>이 내부자료로 번역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로스 테릴의 마오 전기가 처음 번역된 것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해엔 처음으로 마오를 신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 묘사한 취엔옌츠(權延赤)의 <신단(神壇)에서 내려온 마오쩌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마오 열기는 마오 탄생 100주년(1993년)을 즈음한 시기에 불었는데 이번에는 마오에 대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홍태양(紅太陽)’이라는 카세트 테이프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무려 100만개가 팔렸는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그 어떤 가수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 안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마오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마오에 관한 영화도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역설적인 것은 마오가 농민들과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신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마오 탄생 110주년이 되는 2003년에 달아오른 세 번째 마오 열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났다. 상업적 측면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특기한 만한 일이다. 순금으로 된 마오의 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마오의 금상이 주조되어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혹은 뇌물로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마침 올해는 마오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중국의 언론은 이 굵직하고도 중량감이 있는 마오 전기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이 또 다른 마오 열기의 징조가 아닐까 주목하고 있다.
최근 급속히 불거지고 있는 빈부격차가 마오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생전 단지 두 사람 반(충성스런 기밀담당 비서 두 명과 장칭의 반)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던 마오. 그런 마오가 사후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록새록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오에 관한 책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회고하기 위해서 읽고 젊은이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들은 마오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각자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마오의 열기는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기상도(氣象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여전히 마오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신체에 스며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대형 초상화를 배경으로 서 있는 중국 신세대 여성.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가 됐어도 마오에 대한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베이징/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2003년 12월26일은 마오 탄생 110돌, 올해는 타계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마오 열풍이 다시 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그의 고향 후난성 샤오산에서 열린 마오 탄생 기념 행사 장면.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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