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커다란 붓으로 땅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다. 이렇게 땅에 글씨를 쓰는 것은 지서(地書)라고 한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22)/끝
아주 먼 바닷가에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바닷가로 나가서 갈매기들과 같이 놀았는데 무리를 지어 날아오는 갈매기 떼들이 어떤 때는 백 마리도 넘는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듣자하니 갈매기들이 너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 몇 마리 잡아오렴. 나도 같이 놀고 싶으니.” 다음 날 아침 그는 평소와 같이 바닷가에 나갔으나 갈매기들은 주변을 맴돌기만 할뿐 내려오지 않았다.
<열자>의 ‘황제’편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잡아가겠다는 속마음을 숨기고 평소와 다름없이 바닷가에 나갔지만 갈매기들은 그 마음을 눈치 채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잊어라, 잊어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망기(忘機)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무위(無爲) 사상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잘 알려진 유명한 혼돈 우화이다. <장자>의 ‘응제왕’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숙’이라는 남해의 제왕, ‘홀’이라는 북해의 제왕, 그리고 ‘혼돈’이라는 중앙의 황제가 있었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이 거주하는 곳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매우 융숭하게 대접했다. ‘숙’과 ‘홀’은 이러한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요량으로 서로 상의를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에게는 그게 없다. 그러니 그를 위해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그리하여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칠일이 지나서 ‘혼돈’이 죽어버렸다. 이 우화는 인간이 소요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해치게 되는 것은 감각에 의거한 지나친 지식 때문이니 본래의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무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혼돈’이 아직 살아있었구나 문학적 철학이랄까 아니면 철학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장자>나 <열자>에서 처음 이러한 우화를 접했을 때 상상력에 의지해 만들어낸 기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니 그것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번은 공원에 갔다가 한 할아버지가 새와 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는데 정말 예술이었다.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풀어주니 새는 너무나 친근하게 그 할아버지의 어깨가 가 앉았다. 둘은 너무도 다정한 친구였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쇠구슬을 허공을 향해 힘껏 던지자 새가 획하고 날아올라 그것을 물어다가 할아버지의 손에 가 앉곤 했다. 노인은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새와 함께 무심하게 놀고 있었다. 마치 갈매기와 같이 놀았다는 <열자>의 이야기처럼. 아마도 중국에 가본 많은 분들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땅바닥에 글씨쓰고 새와 노는 사람들…
중국 공원의 정경은 고전의 한장면이다
혼돈의 우화를 간직한 소가죽 뗏목이
아직도 황하강을 건너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혼돈 우화에 나오는 혼돈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니 황하를 건널 때 쓰던 소가죽 뗏목의 이름이 ‘혼돈’이었다. 그 뗏목을 고상하게 말하면 치이(범려의 또 다른 별칭이었던 치이자피)라고 하고 속되게 말하면 ‘혼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팡푸라는 저명한 학자의 주장이다. 황하를 건널 때 쓰는 소가죽 뗏목에 구멍을 뚫으면 당연히 죽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황제가 바로 이 소가죽 뗏목이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황당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상당한 문헌적 고증을 거친 탄탄한 주장이라는 점만을 밝혀둔다. 중국에 가면 훈둔이라는 물만두가 있는데 이것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문화방송(MBC)>이 한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방영 중인 ‘황하’(10부작)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책에서만 읽었던 그 소가죽 뗏목이 화면에 나왔기 때문이다. 황허(황하)는 아다시피 중국 서쪽 칭하이성에서 발원하여 쓰촨성, 간쑤성, 닝샤 회족 자치구, 네이멍구 자치구, 산시성(陝西省), 산시성(山西省), 허난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동성을 거쳐 동쪽 발해만으로 흐르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그 가운데에서 간쑤성을 지나는 황하 상류에서는 지금도 소가죽 뗏목을 이용해서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화면에 잠시 소가죽 ‘튜브’를 타고 한 노인이 거친 물살을 헤치며 수영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 아직도 '혼돈‘이 살아 있었구나! 사실 중국이 엄청나게 변하는 가운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한 나라이다. 중국은 역사상 수많은 격동을 겪었고 현재 격변의 와중에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고 전(傳)해져 내려오는 통(統)이 매우 두터운 나라가 아닐까. <장자>와 <열자>는 아주 오래 전에 씌어진 책이지만 거기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은 이처럼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이 아닐까. 일찍이 루쉰은 중국은 “변화가 대단히 쉽지 않은” 나라, “책상을 하나 옮긴다든지 난로를 하나 바꾸는 일조차도 피를 흘리다시피 해야 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전통을 매우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루쉰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사상면에서도 역시 때로는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성급하고 모질어서 장주와 한비자의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공맹의 책은 내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익숙하게 읽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생에 대한 집착이 ‘달생’을 낳아 하지만 중국과 세계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앞서 말한 고전 속의 이야기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에 아련한 향수마저 느끼고 있다. 중국에 갈 때마다 몰라보게 달라진 변화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 세계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공원에 나가보면 천천히 태극권이나 기공을 하는 모습, 음악을 틀어놓고 사교춤을 추는 모습, 대걸레 같은 기다란 붓으로 물을 찍어서 땅바닥에 글씨를 쓰는 모습, 경극의 한 대목을 열창하거나 얼후를 연주하는 다양한 노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저토록 여유로울 수 있을까. 갖가지 혁명으로 점철된 격변의 세월을 겪고도 어떻게 냉소적이지 않고 낙관적일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활력을 잊지 않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닮고 있는 것 같았다. 급변하고 있으면서도 변치않는 전통이 두터운 나라
1년 연재 동안 마음은 온통 중국에 있었습니다
‘도룡술’이나마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 분들의 마음 속 풍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정녕 그러하였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1년 간 생활하고 찾아온 한 학생에게 물었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그 학생 왈 “노인들이 우리보다 즐겁게 사는 것 같아요.”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위의 한 분이 중국의 노인들의 얼굴이 전반적으로 우리에 비해 훨씬 편안해 보인다는 지적을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럴까. 혹시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삶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리쩌허우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현실생활이라는 “하나의 세계”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야훼의 것은 야훼에게”의 “두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차안(此岸)의 삶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라 “소요”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위험’과 ‘불안’의 세계화 한 복판에서도 중국의 많은 노인들은 ‘달생(達生)’이라는 <장자>의 편명처럼 생에 ‘달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연재를 마감하려니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중국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한겨레>의 ‘명’을 받고 작년에 베이징에 갔던 때가 먼저 생각이 납니다. 한중 수교 직후 1년 정도 베이징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고, 여러 차례 단기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서 중국에 가면 제2의 고향 같은 편안한 감정을 느끼곤 했는데 연재를 준비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을 때는 일순간 어디서 무엇을 보고 가야할지 몰라 막막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연재하는 내내 몸은 한국에 있었지만 막중한 부담감을 안고 마음은 온통 중국에 집중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장자>에 용 잡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천금의 가산을 탕진해서 결국 그것을 익혔더니 쓸 곳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족한 도룡술이나마 펼칠 수 있는 귀중한 지면을 마련해준 <한겨레>와 관심 있게 지켜봐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혼돈’이 아직 살아있었구나 문학적 철학이랄까 아니면 철학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장자>나 <열자>에서 처음 이러한 우화를 접했을 때 상상력에 의지해 만들어낸 기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니 그것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번은 공원에 갔다가 한 할아버지가 새와 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는데 정말 예술이었다.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풀어주니 새는 너무나 친근하게 그 할아버지의 어깨가 가 앉았다. 둘은 너무도 다정한 친구였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쇠구슬을 허공을 향해 힘껏 던지자 새가 획하고 날아올라 그것을 물어다가 할아버지의 손에 가 앉곤 했다. 노인은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새와 함께 무심하게 놀고 있었다. 마치 갈매기와 같이 놀았다는 <열자>의 이야기처럼. 아마도 중국에 가본 많은 분들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가죽 뗏목을 타고 황하를 건너는 사람들
중국 공원의 정경은 고전의 한장면이다
혼돈의 우화를 간직한 소가죽 뗏목이
아직도 황하강을 건너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혼돈 우화에 나오는 혼돈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니 황하를 건널 때 쓰던 소가죽 뗏목의 이름이 ‘혼돈’이었다. 그 뗏목을 고상하게 말하면 치이(범려의 또 다른 별칭이었던 치이자피)라고 하고 속되게 말하면 ‘혼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팡푸라는 저명한 학자의 주장이다. 황하를 건널 때 쓰는 소가죽 뗏목에 구멍을 뚫으면 당연히 죽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황제가 바로 이 소가죽 뗏목이라고 주장해서 파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황당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지만 상당한 문헌적 고증을 거친 탄탄한 주장이라는 점만을 밝혀둔다. 중국에 가면 훈둔이라는 물만두가 있는데 이것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문화방송(MBC)>이 한중 수교 1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방영 중인 ‘황하’(10부작)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책에서만 읽었던 그 소가죽 뗏목이 화면에 나왔기 때문이다. 황허(황하)는 아다시피 중국 서쪽 칭하이성에서 발원하여 쓰촨성, 간쑤성, 닝샤 회족 자치구, 네이멍구 자치구, 산시성(陝西省), 산시성(山西省), 허난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동성을 거쳐 동쪽 발해만으로 흐르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그 가운데에서 간쑤성을 지나는 황하 상류에서는 지금도 소가죽 뗏목을 이용해서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화면에 잠시 소가죽 ‘튜브’를 타고 한 노인이 거친 물살을 헤치며 수영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 아직도 '혼돈‘이 살아 있었구나! 사실 중국이 엄청나게 변하는 가운데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을 간직한 나라이다. 중국은 역사상 수많은 격동을 겪었고 현재 격변의 와중에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고 전(傳)해져 내려오는 통(統)이 매우 두터운 나라가 아닐까. <장자>와 <열자>는 아주 오래 전에 씌어진 책이지만 거기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은 이처럼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이 아닐까. 일찍이 루쉰은 중국은 “변화가 대단히 쉽지 않은” 나라, “책상을 하나 옮긴다든지 난로를 하나 바꾸는 일조차도 피를 흘리다시피 해야 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전통을 매우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루쉰 스스로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사상면에서도 역시 때로는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성급하고 모질어서 장주와 한비자의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공맹의 책은 내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익숙하게 읽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생에 대한 집착이 ‘달생’을 낳아 하지만 중국과 세계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의 나는 앞서 말한 고전 속의 이야기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에 아련한 향수마저 느끼고 있다. 중국에 갈 때마다 몰라보게 달라진 변화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 세계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공원에 나가보면 천천히 태극권이나 기공을 하는 모습, 음악을 틀어놓고 사교춤을 추는 모습, 대걸레 같은 기다란 붓으로 물을 찍어서 땅바닥에 글씨를 쓰는 모습, 경극의 한 대목을 열창하거나 얼후를 연주하는 다양한 노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저토록 여유로울 수 있을까. 갖가지 혁명으로 점철된 격변의 세월을 겪고도 어떻게 냉소적이지 않고 낙관적일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활력을 잊지 않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닮고 있는 것 같았다. 급변하고 있으면서도 변치않는 전통이 두터운 나라
1년 연재 동안 마음은 온통 중국에 있었습니다
‘도룡술’이나마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물론 그 분들의 마음 속 풍경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정녕 그러하였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1년 간 생활하고 찾아온 한 학생에게 물었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그 학생 왈 “노인들이 우리보다 즐겁게 사는 것 같아요.”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위의 한 분이 중국의 노인들의 얼굴이 전반적으로 우리에 비해 훨씬 편안해 보인다는 지적을 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럴까. 혹시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삶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리쩌허우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인들에게 현실생활이라는 “하나의 세계”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야훼의 것은 야훼에게”의 “두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차안(此岸)의 삶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라 “소요”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위험’과 ‘불안’의 세계화 한 복판에서도 중국의 많은 노인들은 ‘달생(達生)’이라는 <장자>의 편명처럼 생에 ‘달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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