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금세기에 들어와서 그대에게 일어난 제일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소. 금방 대답할 수 없었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 그렇지만 모르는 새, 변화의 징후가 내 글 속에 드러나 있음에 마음이 미쳤소. ‘문학’에서 ‘글쓰기’로의 변화가 그것. <일제말기 한국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2003), <해방공간 한국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2006) 등 두 저서에서 보다시피 나는 ‘문학’이란 말을 피했소. 시나 소설이란 말도요. 앞의 책은 이른바 이중어글쓰기 공간(1942. 10~1945. 8)의 글쓰기론이며, 뒤엣것은 저 해방공간(1945. 8~1948. 8)의 글쓰기이오. 어째서 그토록 신주단지 모시듯 하던 그 ‘문학’을 피하기 시작했을까.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거룩한 명제가 이 나라 문학사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어찌 내가 필생의 사업으로 문학공부를 했겠는가. 이 점에서 보면 내겐 아무 변화도 없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20세기가 ‘문학’이라면 21세기는 ‘글쓰기’라고 함에는, 곡절이 있었소.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와 ‘인간은 벌레(생물)다’라는 두 명제의 동시적 수용이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아가는 덴 불가피했던 탓이오. 역사·사회학적 상상력과 생물학적 상상력의 동시적 수용이란, 형식논리상으로나 심정상으로도 모순 개념이 아니겠소. 이를 통합하는 방도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벌레가 아니지만 또한 벌레라는 명제는 저 반야심경의 본새로 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닐 수 없지요. 이를 나름대로 수용하거나 초월하려는 모종의 몸부림이 ‘글쓰기’로 퉁겨나왔던 것.
작품이 지닌 미학적 기준도 따지고 보면 특정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닐 수 없는 것. 일종의 세속적인 범주에 드는 것이지요. 이 세속적 범주란, 언제나 시공의 제약 속에 놓이는 이른바 직접성이 아닐 수 없지요. 이 직접성에서 한발자국 물러선 자리가 요망되지요. 여기에 어울리는 것이 글쓰기라 할 수 없겠는가. 당초 글쓰기가 있었는데, 그러니까 여기가 출발점인데 그동안 세속적으로 갈라져 나간 것의 하나가 ‘문학’이었을 터입니다. 세속적, 이데올로기적 글쓰기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기란 무엇인가.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세대로서는 이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어렵지요. 이 강박관념이 문학에서 글쓰기로 나아간 이유이지요. 이 자기모순을 안고 있기에 그만큼 머뭇거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기도 했소. 자유란 그러니까 생산적임을 가리킴이니까.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놓인 또 다른 범주로 들 수 있는 것이 이른바 학(도)병 세대의 글쓰기이오. 학병 세대란 무엇인가. 일제 통치부가 조선인 징병제를 각의에서 통과시킨 것은 1942년 5월이었고 실시한 것은 1943년 8월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지원병이라는 법적 한계를 지닌 것.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것이 조선인 학병 강요였던 것. 드디어 1944년 1월 20일, 약 4500 명의 전문대학생의 징집이 실시되었지요. 이들 학병의 활동양상은 대략 다음처럼 분류되오. (1) 중국 전선에서 탈출한 경우, (2) 탈출하지 않은 채 광복을 맞은 경우, (3) 국내에서 배속되었다가 탈영 또는 해방을 맞은 경우, (4) 일본 본토에 배속되었다 광복을 맞은 경우, (5) 학병 거부의 경우. 신상초의 <탈출>, 장준하의 <돌베개>, 김준엽(탈출 제1호)의 <장강>이 (1)이라면, 그리고 잡지 <학병>을 낸 경우가 (3)이라면, 하준수(남도부)의 경우가 (5)일 터입니다. 이들 글쓰기가 논픽션적 수기의 형식이라면, 그 때문에 사료적 가치를 담뿍 머금고 있다면, (2)(4)에 해당되면서도 허구적 글쓰기를 혼합한 경우는 어떠할까. 3분의 2가 사실이며 나머지는 허구라 공언한 이병주의 <관부연락선> <지리산>, 한운사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의 경우는 과연 무엇일까. 이 모두를 통합하여 고찰할 때 부를 수 있는 적당한 명칭이 있을 수 있다면 ‘학병 세대 글쓰기’라 범칭할 수 없을까. 허구와 기록이 상호 증폭되면서 한층 활성화되어 글쓰기의 깊이를 더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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