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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목’의 작가, 명예박사 되다

등록 2006-07-06 20:26수정 2011-12-13 17:59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명예박사와 명예가족

자줏빛 등꽃이 샹들리에 등불모양 늘어져 있는 관악산 캠퍼스에 갔소. 신식 굿판을 보려고. 굿이란 어떤 것이든 성스러운 것이지만 이번 굿은 썩 유별나 보였소. 떡도 별나지 않겠는가. 11시 정각에 굿판이 벌어졌소. 조금은 높은 단상에는 역대 두목 두 명과 지금의 두목이 버티고 있었소. 조수격인 듯한 이가 먼저 이 굿판의 유래와 성격을 말했소. 개교 60년 이래 이런 굿판이 103회 있었다는 것, 그 중 내국인은 6명뿐이었다는 것. 이번의 경우 내국인으로는 7번째이며 여성으로는 효시에 해당된다는 것.

정작 이 판의 주인공이 등장했소. 단상의 두목들과 꼭 같은 의상을 입고 있지 않겠는가. 관까지 쓰고. 네모난 관에는 금줄이 드리워져 있지 않겠는가.

단상에 오른 주인공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또 많이는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소. 절대로 안 받을 것처럼 강하게 반발을 해 실무자들을 당황스럽게 해드린 점,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라고. 창졸간이라 또 명예박사가 뭔지, 왜 자기에게 주는지 그 성격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그럼 이젠 왜 받기로 했는가. 지금도 잘 모르긴 하나, 한 가지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 대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그것. 대체 그 따위 믿음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목소리가 꿈꾸듯 차분해지지 않겠는가. 제가 이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50년 6월이었습니다, 라고. 이른바 50학번. 첫 강의 시간에 미아리 너머에서 대포 소리가 들렸다는 것. 인민군 3개월 치하는 그대로 견딜 만했는바 많은 시민들이 피난을 못 가고 남았으니까. 그러나 1·4 후퇴의 경우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이었다는 것. 폐도와 같은 서울 바닥에서 이웃도 하나 없이 살았다는 것. 살되, 어린 조카들과 넋 나간 노모를 혼자 힘으로 먹여살려야 했다는 것.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갈데없는 소녀가장. 할 수 있는 것이란, 빈 집에 들어가 묵은 김치나 곡식 따위를 훔치기.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오늘의 신세계 백화점에 있던 미군 피엑스(PX)에 취직이 되었기 때문. 많은 구직자를 물리치고 선발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곧 이 대학의 학생이라는 것이었다고. 이로써 소녀가장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고, 불세출의 화가 박수근도 만났고, 더욱 운명적인 것은 같은 직장의 청년과 만나 5남매를 낳고 행복했다는 것. 이 모든 운명적 행운이 오직 이 대학의 학생이라는 이유에서였다는 것. 이만 하면 이 대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라 할 수 없겠는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문득 <나목>에서 읊은 <소녀의 기도>(릴케)에서 깨어난 듯 숨소리도 눈빛도 획 달라지며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가정주부로서 삶에 안주함에 대한 자기 모멸을 견딜 수 없었노라고. 동족상잔의 짐승스런 시대를 증언해야 하고, 이념의 허망감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 노릇을 하고 싶어졌노라고. 나이 40세에 작가로 나설 수밖에 없었노라고.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리고 <엄마의 말뚝>을 쓰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한순간 굿판이 숨을 죽일 수밖에. 아무리 그렇더라도 굿판은 끝나야 하는 법. 무겁지도 않게 또 가볍지도 않게 한 가지 절차만 남기고 굿판이 끝났소. 사진 찍기가 그것.

대학본부 건물 계단에 겹겹이 서서 사진을 박았소. 모두가 주뼛주뼛 헤어지는 마당. 돌아서다 흘끗 보자니 주인공을 둘러싸고 또 한 무더기 사람들이 따로 사진을 찍지 않겠는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끼어들라고 하지 않겠는가. 굵은 경상도 목소리. 박씨 가문 맏사위가 손짓까지 하지 않았겠소. 끼어들어 사진을 박았소. 귀가하면서 이런 행동에 스스로 만족했소. 명예가족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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