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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맨처음 만난 타자가 조선인이었던 두 일본 소년

등록 2006-08-10 18:17수정 2011-12-13 17:58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오에 겐자부로와 다나카 가쓰히코

겸허한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즐겁소. 그가 작가일 경우 더욱 그러하오. 기록된 목소리인지라 재생시킬 수조차 있으니까. 고쳐 말해 목소리와 기록이 마주쳐 울리는 공명감각이란, 원리적으로는 막연함(vague) 쪽이 아니라 양가적인 애매함(ambiguous) 편에 속하기 때문이오. 그러한 사례의 하나로 지난해 방한한 오에 겐자부로 씨를 들 수 없을까.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인 <애매한 일본의 나>에서 씨는 혼신의 힘으로 막연함이 아니라 양가적 애매함 속에 있는 자기를 세계에다 대고 말하고 있었소. 이 연설문 속엔 한국에 대한 언급이 두 곳 나옵니다. 원폭 희생자 중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지적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중국 작가 정이(鄭義), 모옌(莫言)과 더불어 시인 김지하에 대한 것.

양가적 애매함이란 무엇인가. 일본의 경우 근대 서양문명과 국가관을 겨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과정에서 전통적 생활감각 사이에서 벌어진 갖가지 요소들의 대립이 양가적 애매함의 근거라는 것. 이러한 병집의 치유를 위해 자기의 문학이 향해가고 있다는 것. 세계의 중심이란 어느 곳이든 다 될 수 있다는 생각 위에서 나온 결론이지요. 이런 생각의 씨앗이란 어디에서 배태된 것이었을까. 씨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첩첩 산골 마을에서 자란 유년기에로 거슬러 올라가오. “나는 나만의 후미(물가나 산길이 휘어서 굽어진 곳)를 갖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글(<천황이 사람 목소리로 말하던 날>)에서 씨가 자란 산골 마을이 얼마나 중앙 국가와 맞서고 있었는가를 깨닫는 장면을 담담히 그렸소. 8·15 천황 목소리를 들은 때를 전후해서였소. 두 가지 사실이 소년의 가슴에 새겨졌소. 천황(중앙 국가) 대신 점령군의 군림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여전히 숨은 신으로 군림하는 반중앙정부적인 마을의 전통. 이를 인식하는 장면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씨는 적었소.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무리지어 살고 있던 조선인 소년들의 돌변한 모습에 부딪쳤다는 것. 토끼 교미 장면을 함께 훔쳐보기도 하며 형제처럼 지내던 조선 동무들이 이번엔 머리를 쳐들고 못 본 척 지나치지 않겠는가. 소년은 비로소 타자(他者)를 인식했던 것.

<국가와 언어>의 저자이자 저명한 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씨도 사정이 썩 비슷하오. 모국어란 무엇이며 국가와 언어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또 민족과 언어는 어떤 내면성을 갖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품고 세계의 언어권을 헤맨 씨의 열정과 감각의 예리함은 도처에서 엿볼 수 있소. 그 중의 하나로 <마지막 수업>(도데)의 비판을 들 수 있소. 패전으로 독일어 상용을 강요당한 지역의 불어 마지막 수업의 정경을 그린 이 소설은 실상은 터무니없는 허위라는 것. 어째서? 당초 그 지역은 독일어 상용권이었으니까. 작가가 자기식 이데올로기를 주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언어학자가 최초의 타자의 언어에 마주친 것이 조선어라는 점은 주목할 것입니다. 산골 마을에서 자란 씨의 이웃에 두 조선인 소년 형제가 숨을 죽이며 살고 있었다 하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함께 놀곤 했다 하오. 놀랍게도 천황 목소리 이후 그들은 조선어로 말하지 않겠는가. ‘만세!’ 소리와 함께 마을을 떠나지 않겠는가.

훗날 씨는 이렇게 적었소. “민족해방이란 말은 이 장면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때 처음 나는 외국어라는 것을 들었다”(<언어의 사상>)라고.

타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민족이 아닐 수 없다는 것. 또 그것은 저절로 타민족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는 것. 타민족이나 타언어들 사이에 자기를 놓아둘 때 비로소 각자는 자기의 ‘양가적 애매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의 형성 속에는 저 조선인 소년들의 말과 표정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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