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학병들이 ‘글쓰기 행위’에 집중한 이유

등록 2006-12-21 16:57수정 2011-12-13 17:10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
1944년 1월 20일. 약 4500명의 조선 학병들이 일제히 끌려갔소. 이들과 그 주변의 의식을 학병 세대 의식이라 부를 터이오. 광복 후 생존해서 귀국한 이들의 글쓰기는 논픽션계와 픽션계로 대별되오. <장정>(김준엽), <탈출>(신상초), <돌베개>(장준하), <탈출기>(김문택), <모멸의 시대>(박순동) 등이 전자라면, <관부연락선>(이병주), <분노의 강>(이가형), <현해탄은 알고 있다>(한운사) 등이 후자이겠소. 양쪽 모두 체험에 바탕을 둔 글쓰기이지만, 전자 쪽이 체험의 직접성에 기울어진 것이라면 그 내면화에 기운 것이 후자 쪽이라 하겠소. 이 직접성과 내면성이 마주치는 곳, 거기에서 학병 세대 글쓰기의 본질이 숨쉬고 있지 않을까.

그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거리를 재는 독자의 감각이 요망될 터이오. 그 거리는 처음엔 금방 잡힐 듯하지만 조금만 나아가면 아득해지기 마련. 그러한 아득한 장면 하나를 조금 말해보고 싶소.

여기는 중국, 안휘성 임천(臨川). 때는 1944년 가을. 일본군에서 탈출한 약 80여명의 학병이 중국군관학교에 설치된 한국광복군반에서 약 4개월간 훈련을 받는 장면. 이 교육기간 중 윤제현의 제안으로 장준하, 김준엽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이 잡지 <등불>이었소. 내의를 빨아 만든 표지는 한반도의 지도 속에 등불을 그려 넣은 것. 김준엽의 솜씨. 2호까지 냈고 3호는 중경 임시정부에 가서 냈소. 총 6호. 서안으로 옮긴 이들이 O.S.S.(미군전략첩보부) 훈련 도중 새로 낸 잡지가 <제단>이었소. 2호를 냈을 때 광복을 맞았다 하오.

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하필 잡지를, 그것도 둘씩이나 만들어야 했을까. 무엇을 호소해야 했고 왜 하필 기록물이어야 했을까. 학병 세대만이 지닌 모종의 특수성일까. 아니면 단지 몇몇 학병 탈출자의 기질에서 온 것일까. 후자라면 이를 굳이 학병 세대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르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할까. 이 물음에 응해오는 것이 버마 전선에서 종군한 학병들이 낸 잡지 <신생>이오(이가형, <버마 전선 패잔기>). 이가형, 차주환, 김정례 등이 주축이 되어 한인 수용소에서 낸 <신생>은 대체 무엇인가. 또 있소. 버마 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박순동 등은 인도, 대서양, 미국 본토를 건너 태평양의 카타리나 섬에서 O.S.S. 훈련을 받는 도중 해방을 맞았소. 딱하게도 이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것. 포로수용소에서 박순동들이 낸 잡지는 <자유대한>이었소(박순동, <모멸의 시대>). 태극기와 무궁화가 3색으로 그려진 이 잡지는 또 무엇인가. 박순동, 이종실, 박정무 등이 미군의 도움으로 매주 1350부를 냈다 하오.

유감스럽게도 <등불> <제단> <신생>은 물론 <자유대한>도 깡그리 소멸되어 남아 있지 않소(<등불> <제단>은 장준하 씨가 갖고 귀국했으나 6·25때 분실). 그렇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소중한 것이 따로 있소. 학병이기에 감히 할 수 있었던 모종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기록성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또 저절로 궁극적으로는 글쓰기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

그렇다면 대체 글쓰기 행위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이젠 피해나갈 수 없게 되었소. 지식인으로서의 학병 세대가 아닐 수 없다는 것. 입신출세주의를 목표로 한 일제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것. 당시 사상계를 휩쓴 ‘교양주의’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선발된 엘리트 계층 출신이기에 민족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인류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것만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거기에 글쓰기의 본질이 있소. 곧 자기 해방을 위한 글쓰기라는 것이 그것. 지옥의 전쟁 체험, 명분 없는 죽음에 대한 이율배반적 심리로 인한 상처에서 해방되기, 이 정신적 상처의 치유방식이 글쓰기의 본질이었다는 것.

김윤식/문학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