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
1944년 1월 20일. 약 4500명의 조선 학병들이 일제히 끌려갔소. 이들과 그 주변의 의식을 학병 세대 의식이라 부를 터이오. 광복 후 생존해서 귀국한 이들의 글쓰기는 논픽션계와 픽션계로 대별되오. <장정>(김준엽), <탈출>(신상초), <돌베개>(장준하), <탈출기>(김문택), <모멸의 시대>(박순동) 등이 전자라면, <관부연락선>(이병주), <분노의 강>(이가형), <현해탄은 알고 있다>(한운사) 등이 후자이겠소. 양쪽 모두 체험에 바탕을 둔 글쓰기이지만, 전자 쪽이 체험의 직접성에 기울어진 것이라면 그 내면화에 기운 것이 후자 쪽이라 하겠소. 이 직접성과 내면성이 마주치는 곳, 거기에서 학병 세대 글쓰기의 본질이 숨쉬고 있지 않을까.
그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거리를 재는 독자의 감각이 요망될 터이오. 그 거리는 처음엔 금방 잡힐 듯하지만 조금만 나아가면 아득해지기 마련. 그러한 아득한 장면 하나를 조금 말해보고 싶소.
여기는 중국, 안휘성 임천(臨川). 때는 1944년 가을. 일본군에서 탈출한 약 80여명의 학병이 중국군관학교에 설치된 한국광복군반에서 약 4개월간 훈련을 받는 장면. 이 교육기간 중 윤제현의 제안으로 장준하, 김준엽 등이 주동이 되어 만든 것이 잡지 <등불>이었소. 내의를 빨아 만든 표지는 한반도의 지도 속에 등불을 그려 넣은 것. 김준엽의 솜씨. 2호까지 냈고 3호는 중경 임시정부에 가서 냈소. 총 6호. 서안으로 옮긴 이들이 O.S.S.(미군전략첩보부) 훈련 도중 새로 낸 잡지가 <제단>이었소. 2호를 냈을 때 광복을 맞았다 하오.
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 어려운 와중에서도 하필 잡지를, 그것도 둘씩이나 만들어야 했을까. 무엇을 호소해야 했고 왜 하필 기록물이어야 했을까. 학병 세대만이 지닌 모종의 특수성일까. 아니면 단지 몇몇 학병 탈출자의 기질에서 온 것일까. 후자라면 이를 굳이 학병 세대와 결부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르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할까. 이 물음에 응해오는 것이 버마 전선에서 종군한 학병들이 낸 잡지 <신생>이오(이가형, <버마 전선 패잔기>). 이가형, 차주환, 김정례 등이 주축이 되어 한인 수용소에서 낸 <신생>은 대체 무엇인가. 또 있소. 버마 전선에서 탈출한 학병 박순동 등은 인도, 대서양, 미국 본토를 건너 태평양의 카타리나 섬에서 O.S.S. 훈련을 받는 도중 해방을 맞았소. 딱하게도 이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것. 포로수용소에서 박순동들이 낸 잡지는 <자유대한>이었소(박순동, <모멸의 시대>). 태극기와 무궁화가 3색으로 그려진 이 잡지는 또 무엇인가. 박순동, 이종실, 박정무 등이 미군의 도움으로 매주 1350부를 냈다 하오.
유감스럽게도 <등불> <제단> <신생>은 물론 <자유대한>도 깡그리 소멸되어 남아 있지 않소(<등불> <제단>은 장준하 씨가 갖고 귀국했으나 6·25때 분실). 그렇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소중한 것이 따로 있소. 학병이기에 감히 할 수 있었던 모종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기록성의 행위라는 것. 그것은 또 저절로 궁극적으로는 글쓰기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
그렇다면 대체 글쓰기 행위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이젠 피해나갈 수 없게 되었소. 지식인으로서의 학병 세대가 아닐 수 없다는 것. 입신출세주의를 목표로 한 일제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것. 당시 사상계를 휩쓴 ‘교양주의’ 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선발된 엘리트 계층 출신이기에 민족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인류에 대한 사명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것만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거기에 글쓰기의 본질이 있소. 곧 자기 해방을 위한 글쓰기라는 것이 그것. 지옥의 전쟁 체험, 명분 없는 죽음에 대한 이율배반적 심리로 인한 상처에서 해방되기, 이 정신적 상처의 치유방식이 글쓰기의 본질이었다는 것.
김윤식/문학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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