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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작중인물 속에 갇힌 수인들

등록 2007-04-12 16:14수정 2011-12-13 17:05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 /
김사량(1914-50)의 연안행 탈출기 <노마만리>(1947) 서두엔 북경역이 등장하오. 출발하는 기차를 따라가며 어떤 미모의 여인에게 한 사내가 꾸러미와 편지를 전하며 외치고 있소. 우리 집에 들르거든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라고 전해달라고. 꾸러미 속엔 아기용 가죽 구두 두 켤레. 편지는 아내에게 보내는 것. 그 미모의 여인을 다만 ‘여류시인 R여사’라고만 적었소. 당시 현지에 있던 일본 기자 나카조노 에이스케와 매일신문 북경지사장 백철의 기록으로 보면 이 여인은 바로 시인 노천명(1912-57).

중국전선 파견 조선인 학병 위문차 저 악명 높은 국민총력조선연맹 파견으로 뽑힌 조선 문인은 김사량과 노천명. 그들이 한 달 예정으로 북경에 온 것은 1945년 5월 8일. 또 한 번의 역사의 격동기, 6·25. 모 사건으로 위기에 놓인 노천명이 인민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서울에 온 김사량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냉담히 물리치더라고 그녀는 적었소.(<오산이었다>, 1952)

이런 정치와 문학의 배리(背理) 앞에 누가 함부로 논평할 수 있으랴. 우리의 관심은 따로 있소. 문학적인 것 말이오. 목숨을 건 연안행이란 한 인간에게 무엇일까. 한국인이기 전에 또 지식인이기 전에 그는 한 지아비요 아비가 아니었던가. 마지막일지 모르겠기에 ‘하루 종일 고르고 고른 것’. 아기용 가죽 구두 두 켤레. 여기에 시선이 잠시 머문 독자가 김사량의 <향수>(1941)를 읽어본다면 어떠할까. 일어로 쓴 이 작품의 화자는 제국대학 연구생 조선 청년. 이름은 현. 이 속엔 썩 인상적인 인물이 나오오. 왕년의 혁명가 옥상렬. 북경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귀국 불능의 노혁명가가 귀국하는 현에게 부탁한 것은 고향에 전하는 꾸러미 하나. 유복자와 다름없는 아들 내외의 혼수예물인 두 켤레의 싸구려 신발과 노처용 수정 안경. 이 장면에까지 오면 문득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구를 떠올릴 법하오. <향수> 속의 사건이 4년이 지난 <노마만리>에서 현실화되어 있으니까.

잠깐, 그게 어째 유별난가. 그런 모방 행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사르트르의 세기>(2000)의 저자 레비 씨는 소설 <구토>(1938)와 작가의 포로수용소 체험(1940), 또 자전소설 <말>(1964)과 작가의 왕년의 실명 사건을 들어 ‘소설과 작가와 그의 인생이 보여준 천재적 묘기’라 했소.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구토>의 주인공이 그토록 미워하며 야유하던 휴머니스트인 ‘독서광’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작가는 포로수용소 체험을 통해 철저히 닮아갔으니까. 공동체 발견, 이른바 참여문학이 그것. 또한 <말>에서는 10년 뒤에 닥쳐올 자기의 맹목을 선취했으니까. 그런데 딱하게도 레비 씨는 이렇게 또 비판해 마지않았겠소. ‘자살과 흡사한 상궤를 벗어난 회심(回心)’이라고.

여기까지 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없을까. <노마만리>와 <향수>의 경우는 저 사르트르와는 차원이 다르다, 라고. 후자가 내면의 문제, 곧 ‘회심’의 현상임에 비해 전자는 구체적인 현실의 사건이기에. 노천명이 등신대로 등장했으니까.

<해방전후>(1946)의 작가 이태준(1904-?)의 경우는 어떠할까. 국권상실기엔 소극적 자세를 취한 작가 현이 해방공간에서는 적극적으로 역사에 참여하는 과정을 다룬 이 문제적인 작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오. 두루마기 차림으로 상경한 김직원이 어려운 시대의 벗인 후배가 공산당이 되었다고 비판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분연히 떠나는 장면을 두고 작가는 이렇게 적었소. 청나라의 순국한 시인 왕국유에 비유, ‘시대의 대사조 속에 사라지는 한 조각 티끌’이라고. <소련기행>(1947), <농토>(1948)의 작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회장인 이태준이 반동작가로 규정, 교정원, 고철 수집 노동자로 전락된 바 있다 하오. 고철 수집의 막노동 속에서 혹시 이태준의 머릿속엔 ‘세계사의 대사조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가라앉아가는 김직원의 표표한 뒷모양’이 스쳐가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작가란 자기 소설 속의 인물의 운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수인(囚人)이라 할 수 없을까.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 자연도 예술을 모방하니까.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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