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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역사에 삿대질할 수 있는 것이 작가다

등록 2007-06-01 20:01수정 2011-12-13 16:56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6·25의 폐허와 굶주림을 체험한 세대의 처지에서 보면 경제 성장 세계 12위권의 오늘날 이 나라의 번영이란 신기루 모양일 법도 하오. 그러한 조짐이 서울 상공에 무지개로 떠오른 것이 88올림픽이 아니었을까. 이 무지개에 유독 가슴 설렌 부류 중엔 응당 재외 한인 동포들도 있었을 터. 그 중엔 일제 강점기 시베리아 벌판으로 유랑한 고려인도 있었을 터. 살기 위해 본색은 물론 모국어까지 꿈에라도 한사코 잊어야 했던 이 고려인이 88올림픽 서울 방송을 보고야 고국과 혈육의 정이 핏줄 속에서 꿈틀거렸다면 어떠할까. 그로부터 모국어와 기억 되살리기에 10년의 세월이 흘렀다면 어떠할까. 제일차적 목적이 2002년 월드컵 기간의 모국 방문하기였다면 어떠할까. 실제로 우즈베크 고려인 단체에서는 월드컵 기간을 이용해 고국방문단 조직 사업이 벌어졌것다. 절차상 고국의 혈육과 선이 닿아야 가능했것다. 그런 사람 중에 유일승 씨가 있었다 하오. 철도 나기 전인 8세 적에 연해주로 갔고, 철날 무렵 우즈베크 쪽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곳 전문학교를 나와 농업지도원으로 정착해 오늘에 이른 위인. 나이 일흔에 마침내 조국 땅에 왔다 하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를 초청하고 극진히 모신 친아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감격했을 터. 그럼에도 뭔가 속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아우가 직감했다면 어떠할까. 이런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 홀연히 귀국해 버렸다면 어떠할까. 아우의 안타까움은 어디로 향해야 적절했을까. 아우의 안타까움이 2006년 월드컵 16강 진출전을 기회로 형을 한번 더 초청하기로 향했다면 어떠할까. 아우의 이 또 한번의 지극한 정성을 정중히 거절한 형의 이유인즉 이러하오.

사랑하는 아우여, 나는 조국을 세 번씩이나 잊기로 했다네. 남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국을 지워야 했던 청소년기가 그 하나. 두 번째는 6·25 때. 조국을 잃은 망국인에겐 지구 저편 한쪽에 그런 조국이나마 하나로 뭉쳐 남아 있는 게 나아 보였으니까. 가고 싶지는 않아도 용서해야 했으니까. 세 번째는 바로 월드컵의 서울 분위기. 붉은 악마들의 ‘대에한민국!’의 외침이란 ‘혁명의 흐름’이 아니겠는가.

이상은 이청준 씨의 최근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21세기문학〉, 봄호)의 줄거리오. 형의 이런 심정고백을 아우가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 어찌 아우뿐이랴. 작가도 마찬가지. 이 역사에 작가라고 해서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법. 그렇다면 대체 작가란 무엇인가. 남의 얘기를 모아 그럴듯하게 전달만 하면 장땡인가.

이 물음 앞에 작가 이청준 씨가 알몸으로 서 있어 인상적입니다. 형의 편지를 읽은 아우가 저지른 엉뚱한 행동이 그것. 붉은 악마 옷을 사 입고 16강 진출전의 응원이 크게 벌어지는 K(케이)시로 달려가 화장실 가는 것을 빼놓고는 군중과 함께 미치광이가 되어 K시 중앙광장에서 ‘대에한민국!’을 외치지 않겠는가. 2:0으로 참담히 졌는데도 ‘대에한민국!’을 외치기. ‘웬 정신 나간!’이라는 주변의 비웃음소리도 아랑곳을 않은 채 늙은이 혼자서 외쳐대기.

작가란 무엇이뇨. 역사에 개입은 할 수 없다 해도 그 역사에 대들 수는 있는 법. 역사를 향해 삿대질을 할 수는 있는 법. 역사에 대해 몸부림은 칠 수 있는 법. 주변에서의 비웃음소리도 아랑곳 않은 채 그렇게 몸부림치기인 것.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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