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낯설다>
남경태의 책 속 이슈 / <나는 내가 낯설다>
티머시 윌슨 지음·진성록 옮김/부글북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으로, 〈논어〉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나온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그 구절을 적용한다면 그는 당연히 불만일 것이다. 무의식의 의미를 발견해 현대의 지적 지형에 엄청난 영향을 준 자신을 가리켜 과유불급이라니! 오히려 그는 〈논어〉처럼 철저하게 이성적인 자세로 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을 전혀 모르는 소치라며 공자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비록 무의식에 무지했을지 몰라도 과유불급은 프로이트에게 적절한 꼬리표다. 무의식을 띄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기서 오버드라이브하는 바람에 프로이트는 오히려 무의식의 의미를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토대로 정신분석학 체계를 정립했다. 정신을 이드-자아-초자아로 나누고, 무의식을 대표하는 이드의 내면에 억압된 콤플렉스를 가정하고, 그 콤플렉스의 본질을 성욕으로 간주하는 다분히 모험적인 이론 체계다. 이렇게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하는 과정이 바로 과유불급이었다. 무의식을 부각시키는 데서 멈췄더라면 그는 중용의 꼬리표를 얻었을 것이다. 심리학 대중화의 기수를 자처한 티머시 윌슨의 〈나는 내가 낯설다〉는 프로이트가 샛길로 빠진 곳에서, 곧 모자람만 못한 지나침으로 접어든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버리고 ‘발상’만 채택하면 된다. 성욕을 골간으로 하는 정신분석학 체계를 포기하고, 무의식의 개념을 더욱 연장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적응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성적 관념 이상으로 유용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상식 이상으로 일상생활에 이미 작용하고 있다. 모든 일을 의식으로만 처리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밥을 먹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숟가락을 어떤 힘으로 들어야 제대로 입을 겨냥할 수 있는지, 운전대를 어느 각도로 틀어야 올바로 우회전을 할 수 있는지 일일이 계산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진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자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적응 무의식이다.
지은이는 신경에 손상을 입어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잃은 환자의 예를 든다. 그 환자는 팔다리를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기능을 잃은 탓에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따지고 계산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통제하는 법을 익힌다. 그런 방식으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심지어 운전까지 배웠으나 문제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눈으로 봐야만 통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전기가 나가자 그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리고 꼼짝도 못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 병리적인 요소를 찾아내고자 했으나 윌슨은 반대로 일상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무의식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자연스럽게 연장하면 적응 무의식의 개념으로 쉽게 이어진다. 과유불급이 무리수를 부른 경우다.
남경태/번역가·저술가
티머시 윌슨 지음·진성록 옮김/부글북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으로, 〈논어〉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나온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그 구절을 적용한다면 그는 당연히 불만일 것이다. 무의식의 의미를 발견해 현대의 지적 지형에 엄청난 영향을 준 자신을 가리켜 과유불급이라니! 오히려 그는 〈논어〉처럼 철저하게 이성적인 자세로 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을 전혀 모르는 소치라며 공자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자는 비록 무의식에 무지했을지 몰라도 과유불급은 프로이트에게 적절한 꼬리표다. 무의식을 띄운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기서 오버드라이브하는 바람에 프로이트는 오히려 무의식의 의미를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토대로 정신분석학 체계를 정립했다. 정신을 이드-자아-초자아로 나누고, 무의식을 대표하는 이드의 내면에 억압된 콤플렉스를 가정하고, 그 콤플렉스의 본질을 성욕으로 간주하는 다분히 모험적인 이론 체계다. 이렇게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하는 과정이 바로 과유불급이었다. 무의식을 부각시키는 데서 멈췄더라면 그는 중용의 꼬리표를 얻었을 것이다. 심리학 대중화의 기수를 자처한 티머시 윌슨의 〈나는 내가 낯설다〉는 프로이트가 샛길로 빠진 곳에서, 곧 모자람만 못한 지나침으로 접어든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버리고 ‘발상’만 채택하면 된다. 성욕을 골간으로 하는 정신분석학 체계를 포기하고, 무의식의 개념을 더욱 연장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은이는 적응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성적 관념 이상으로 유용한 개념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상식 이상으로 일상생활에 이미 작용하고 있다. 모든 일을 의식으로만 처리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누구나 밥을 먹으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숟가락을 어떤 힘으로 들어야 제대로 입을 겨냥할 수 있는지, 운전대를 어느 각도로 틀어야 올바로 우회전을 할 수 있는지 일일이 계산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진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자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적응 무의식이다.
남경태/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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