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5월은 춘향의 달, 사랑의 달, 사랑의 도시 남원에서 제77회 춘향제가 향기롭게 펼쳐집니다”라는 깃발 아래 5일간의 대제전이 광한루의 고장에서 펼쳐졌소. 그 전야제로 전례 없던 국제 학술심포지엄이 또한 펼쳐졌소. 카자흐스탄 태생인 소설가 아나톨리 김과 프랑스인 장 노엘 주테 두 분이 주빈. 앞엣분은 춘향전의 러시아어 번역자(김현택 교수와 공역, 모스크바, 2003)의 자격이었고, 뒤엣분은 춘향전의 불역자(최미경 교수와의 공역, 파리, 1998)의 자격이었소. 한국문학번역원의 집계로, 춘향전은 이미 20여국어로 번역되었다 하오. 그럼에도 춘향제 주관측에서 유독 이들을 먼저 주목한 곡절이 궁금했소. 두 시간에 걸친 이들의 발표와 청중의 질의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곡절이 조금은 엿보였다고나 할까. 슬라브어 상용권의 이름난 중견작가의 춘향전 읽기 및 그 번역의 의의, 곧 한국어를 모르는 동포 2세의 모국 고전에 대한 감각이란 어떠할까. 이 난감한 물음 앞에 김씨는 이렇게 답했소. 남원에 일 년쯤 머물며 작품을 쓰고 싶다고. 번역자이기에 앞서 작가임을 내세움으로 들렸소.
장 노엘 주테의 강조점은 선택된 텍스트에 놓여 있었소. 두루 아는 바 우리 고전 중 춘향전만큼 이본(약 20여 개)이 많은 것은 달리 없소. 그 중 어느 것을 텍스트로 삼았을까. 먼저 그는 불역 제목을 보라고 했소. 〈충실한 춘향의 노래>(Le Chant de la fidele Chun Hyang). 텍스트가 판소리계본인 〈열녀춘향수절가〉임을 내세웠소. 요컨대 ‘노래’라는 것. 노래이기에 언어의 흐름에 고심할 수밖에. 그런 사례로 역자가 든 것은 광한루에서 춘향의 그네 뛰는 한 대목.
“한참 이렇게 노닐 적에 시냇가 반석 위에 옥비녀 떨어져 쟁쟁하고 비녀, 비녀 하는 소리. 산호 채찍을 들어 옥방울 깨는 듯한 …”
역자의 난감함이 장내를 압도했소. 그 때문인지 최초로 춘향전 주석을 단 도남(陶南) 조윤제 선생이 던진 의문점인, 어째서 출가 전 처녀가 비녀를 꽂았는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소.(원래 비녀는 낭자 머리에 소용된 것. 기혼녀의 전유물로 된 것은 정조 시대 이후)
이튿날 일행은 광한루로 갔소. 오작교도 대숲도 김종서, 장택상의 현판도 그대로였고, 이당(以堂)이 그린 초상화도 그대로였소. 또 갈 곳이 있었소. 춘향묘 참배가 그것. 정유란의 만인총을 가진 남원이 춘향묘까지 갖고 있다는 사실, 77년을 버티어온 춘향제의 저력이 이 속에 있지 않았을까.
이상이 제가 들은 두 가지, 본 두 가지요. 내려오는 기차를 위해 올라가는 기차가 길을 비켜서야 하는 전라선 새마을호로 상경하면서 저는 엉뚱한 느낌 하나를 누르기 어려웠소. 어째서 아직도 춘향제가 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무형문화재)에 등재되지 않았는가가 그것. 혼자 또 멋대로 생각했소. 이곳 분들이 그런 것에 아마도 초연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춘향전이란 인류의 것이 아니겠는가. 모차르트의 〈사랑의 시련〉처럼 동서고금에 통하는 영원한 과제인 만큼 유네스코의 이름까지 빌릴 필요가 새삼 있었겠는가. 그러자 어느새 어둠이 스며와 제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지 않겠는가. 기차 바퀴 소리에 묻혀 환청인 듯 다감한 목소리 하나가 제 부끄러움을 또 한 번 덮어주지 않았겠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우리나라 섬기던 한 옛적에는 춘향과 이도령도 살았다지요”(김소월, 〈춘향과 이도령〉 부분)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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