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휘파람 행진곡의 익살스러움을 아시는가. 그럴 수 없이 경쾌한 행진곡에 누더기 군복 차림의 영국군 포로의 행진이 화면 가득 펼쳐졌소. 차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두목 니콜슨 대령의 당당함, 그를 따르는 병졸들의 해맑은 표정. 영화 <콰이 강의 다리>(1957, 데이비드 린 감독)를 보고 있노라면 연합군 포로 수만 명의 희생 위에서 가까스로 이루어진 태국·미얀마 접경 철도 건설(1942~43)의 비극은 가뭇없고 문득 저 헤겔의 주인·노예의 변증법만이 커다란 얼굴을 내밀고 있소. 다리 건설 과정을 통해 포로수용소 소장 사이토 대령이 노예로 전락하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지 않겠는가. 설계도를 작성할 수 있는 노예란 벌써 노예일 수 없는 것. 이 점을 1930년대 코제브는 파리고등연구원에서 메를로 퐁티, 조르주 바타유 등에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기껏해야 행진곡의 경쾌함이 가까스로 남았을 뿐.
원작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원작자 피에르 불의 소설 <콰이 강의 다리> 제1부에는 이런 대목이 있소. “니콜슨 대령은 두 사람의 거인에게 끌려갔다. 그들은 둘 다 조선인으로 사이토의 호위병이었다”(오징자 역)라고. 잇달아 이렇게도 적혀 있지 않겠는가. “한 주일 동안을 그는 고릴라 같은 조선인 보초병의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 보초병은 자기 개인의 특권으로 매일같이 쌀밥에 소금을 덧쳐주는 것이었다”라고. 또 썼군요. “니콜슨 대령은 또 다시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못생긴 조선인은 처음의 그 비인간적 대우를 다시 하라는 냉혹한 명령을 받았다. 사이토는 그 호위병까지 때렸다”라고. 일본군은, 포로 감시원으로 조선인을 사용했음이 조금은 드러나 있소. 8년간 말레이시아에서 토목기사로 종사한 작가이고 보면 이 점이 썩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오.
어째서 일본군은 포로수용소 감시병에 조선인을 사용했을까. 이 물음은 혹시 전범으로 연합군에 의해 처형된 홍사익(1900~46) 중장에도 이어질까. 조선인으로 별을 셋이나 단 이는 홍사익뿐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일. 육사 26기이자 조선인으로 유일한 육대 출신의 홍사익이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간 것은 1944년 10월. 처형 당한 것은 종전 이듬해 9월. 그렇다면 사이토 대령에게 모질지 못한 탓에 얻어맞은 고릴라처럼 생긴 조선인 감시병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 하나를 잠시 볼까요. 조선인 학병으로 비극의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귀환한 이의 기록에 따르면 귀국선 캠벨호엔 병정 40여 명이 위안부 5백여 명 그리고 포로감시원 7백여 명이 탑승했다 하오(이가형, <버마 전선 패잔기>). 기억에 의한 기록이기에 그 숫자의 정확성 여부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요컨대 기록자의 말 그대로 ‘모두가 불운했던 민족의 제물들’임엔 분명합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 중 전범으로 처형된 조문상(趙文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유령으로라도 지상에 떠돌 것이다. 그도 불가능하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떠돌 것이다”라고.
<콰이 강의 다리>란 우리에겐 새삼 무엇일까. 하나는 영화이고 또 하나는 소설이다, 라고 스스로 묻고 대답해 봅니다. 환각으로서의 스크린이고 환청으로서의 휘파람 소리이다, 라고. 동시에 사실이고 역사이다, 라고. 그렇다면 실체란 없는 것일까. 만일 실체란 것이 있어야 한다면 거기에 놓인 실체란 저 헤겔이 말하는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아니었을까.
김윤식 / 문학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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