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책 속 이슈
장정일의 책 속 이슈/
나는 한번도 외국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무슨 세미나가 있어서 일본에 아흐레를 묵어야 한다면, 아홉 권의 일본 소설을 가지고 가서 하루에 한 권씩 읽고 돌아오곤 했으니 그건 여행이 아니다. 엉뚱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장소는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욕조다. 이때 손바닥에 배어드는 습기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걷어내기 위해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것은 필수.
한 십여년 전, 중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 만리장성 코 앞에서, 나홀로 호텔방에 남았다. “흥, 그 까짓 만리장성!” 그러면서 그날치의 중국 소설을 읽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채 뜨거운 욕조의 물이 식을 때까지 책을 읽는 여행자. 아무리 현지에서 읽는 그 나라의 소설이 각별한 독서 아우라를 선사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지난 11월30일에서 12월6일까지 6박7일 동안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관하는 한-러 문학교류 행사에 참가했다. 이번에도 여섯 권의 러시아 소설을 챙겨가고자 책을 골랐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 그것들을 털어냈다.
하루에 한 권씩, 가져간 책을 모두 독파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이번 여행에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그 조바심이 책읽기에 필요한 적당한 동력이 되어 주었으나, 이제는 그 조바심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늙은 것이다.
그래서 골라든 책이 마르크 슬로님의 〈소련현대문학사〉(열린책들, 1989). 시대순으로 대표적인 작가와 문학사조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작은 러시아 작가사전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어, 오랫동안 러시아 작가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참조하곤 했으나 완독을 하진 못했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 자주 들르는 단골 헌책방에서 D. S. 미르스키의 〈러시아문학사〉(문원출판, 2001)를 구했다. 앞의 책이 1917년 혁명 전의 과도기부터 소련공산당 치하의 사미즈다트(지하출판)까지를 다루었다면, 뒤의 책은 11세기 초 고대 러시아 문학의 발생에서부터 혁명 직후인 192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러시아 작가들과 서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야코프스키와 불가코프의 나라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악마와 마르가리따〉(삼성출판사, 1983)라는 제명으로 처음 선보였으나 훗날 〈거장과 마르가리따〉(한길사, 1991)로 게재된 불가코프의 작품을 읽고 그의 ‘광팬’이 되기 훨씬 전에, 나의 러시아 문학 우상은 단연 마야코프스키였다. 20대 초반 문청 시절, 앤 차터스와 새뮤얼 차터스 부부가 함께 쓴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까치, 1981)을 읽은 순간부터, 러시아는 내 청춘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해가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아침은 희뿌연 새벽과 구분이 되지 않았고, 오후 네 시에는 아예 해가 졌다.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는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 욕조 속에서 문학기행을 했다. 레닌은 미학적 전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공산당 관료들에겐 상상력이 마비되고 없었다. 절판된 마야코프스키 희곡집은 재간되어야 하고, 미간인 불가코프의 작품은 속간되어야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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