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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실험 권리 얻고 노래 잃은 ‘노래파’

등록 2007-11-23 18:56수정 2007-11-23 19:23

〈트랙과 들판의 별〉
〈트랙과 들판의 별〉
장정일의 책 속 이슈 /

〈트랙과 들판의 별〉황병승 지음/문학과지성사

‘미래파’로 불리는 황병승 시인의 <트랙과 들판의 별>을 읽었다. <미학이론>을 쓴 아도르노는 “새로운 형태에 대한 반감은 기존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억압하고 소외시켰는가 하는 데 대한 하나의 방증이다”라면서 “형태의 해방에서 사회의 해방이 계산된다”고도 썼다. 하지만 나는 예의 그 ‘새로운 형태’가 시의 원초성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것을 느꼈다. 시인은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노래가 되지 않는 자기 시를 모질게 자해하면서, 사라져 버린 노래(시)를 상투적인 반복구와 변주로 보상한다. 시 ‘멀고 춥고 무섭다’는 전통적인 시(노래)와 현대시(‘미래파’) 사이에 벌어진 내면의 싸움이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한국문학의 향도 노릇을 했던 민족문학도 따라 쇠퇴했다. 하지만 그 쇠퇴는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진 것과 같아서, 1990년대 이후에 출현한 소소한 문학운동은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와 연관을 맺게 됐다. 여성시(담론)는 여성운동(담론공동체)과 함께하면서 여성부(정부기구)를 만들도록 했고, 환경시는 환경·생태운동을 지원하거나 선전하면서 정부의 환경 정책에 영향을 준다. 이렇듯 ‘담론·담론공동체·정부기구’라는 삼위일체는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는데, 이런 양태의 전례는 아마도 노동시가 노동해방운동이나 단체와 분리되지 않으면서 정부의 노동정책과 투쟁했던 1990년대 이전의 노동문학일 것이다.

문학 운동이나 유파가 곧 사회운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과 기름’ 같은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말 많았던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해체주의) 문학조차도, 여러 예술운동이나 사회부문과 연동되었지 고립되어 있진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당대의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영화 등의 예술과 접속했을 뿐 아니라, 정치·외교·사회·문화·광고 등을 설명하는 광범위한 접두어였다. 거기에 비해 ‘미래파’는 왜소하다. 그것은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떤 동시대 예술인과도 소통하지 못한다.


장정일의 책 속 이슈
장정일의 책 속 이슈
역설적이게도 ‘미래파’의 희망은 문학과 사회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현재의 사태다. 한 20여년 전에 나는 “실험이란, 천국에 가기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따먹지 않으면 안 될 쓰디쓴 열매”라고 썼지만, 그때는 문학을 모르는 사람도 누군가 시를 쓴다고 하면, 자신이 앉은 자리를 내어주며 ‘여기 앉아 보라’고 권했던 때였다. 사회는 문학인에게 ‘당신의 말을 들어보고 싶다’면서 ‘사회적 덤터기’를 안겼고, 문학인은 그것을 자랑스레 수긍했다. 때문에 실험은 사회적 조건에 구속됐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시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시대, 당신들은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는 백수다. 그러니 마음대로!


‘백수파’는 이렇게 태어났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은 오로지 소설이라고 했던 이면에는, 시의 무책임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그건 한국 근·현대사에서 시가 차지한 역할을 그가 몰랐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미래파’는 무한한 실험의 권리를 얻는 대신, 시의 원초성인 노래를 잃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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