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배>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노성두 옮김/안티쿠스
남경태의 책 속 이슈 / <바보배> 제바스티안 브란트 지음·노성두 옮김/안티쿠스
학력 위조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일부 예술계 인사들에게서 시작된 학력 위조 파문은 점차 방송계와 종교계로 퍼졌고, 바야흐로 대형 정치 스캔들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제 어느 누가 학력 ‘커밍아웃’을 한다 해도 별로 놀라울 게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런 터무니없는 사태를 맞아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어떤 이유에서든 드러난 거짓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어떤 당사자는 학력 위조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이익을 봤든 어쨌든 학력을 속인 자는 거짓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실패한 범죄도 범죄니까.
우리 사회는 단지 거짓을 용인할 뿐 아니라 이미 드러난 거짓까지도 쉽게 잊는 나쁜 습성에 젖어 있다. 그래서 거짓말임이 밝혀지는 과정을 보면 비리가 적발된 정치인이나 음주운전으로 걸린 시민이나 마찬가지다. 일단 오리발을 내밀어 시간을 벌고, 나중에는 자기만 그런 게 아니라며 억울해하는 식이다. 윗물과 아랫물이 다 이래서야 거짓을 배척하는 풍토가 조성될 리 없다.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것도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호도하려는 거짓말이 탄로 났기 때문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우리 사회에 만연된 지나친 학력 중시 풍조는 대체 뭘까? 학력과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사회 각 분야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허울에 불과한 학력에 여전히 집착하는 걸까?
그 이유는 인물을 평가하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인물을 발탁할 때는 추천의 절차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추천을 별로 믿지 않고, 추천의 과정도 정실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위나 졸업장 같은 서류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우리는 아직 가시적인 증거, ‘비주얼’에 집착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외모지상주의도 같은 맥락일까?). 시험 대신 추천으로 인재를 선발하려 했던 조광조의 현량과는 훈구파의 거센 반발을 받아 좌초했지만, 500년 뒤인 지금 시행한다 해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조광조가 한창 개혁의 꿈을 품을 무렵인 1494년 유럽에서 출간된 세상 모든 바보들의 이야기, 〈바보배〉가 지금 우리에게 더 현실적이다.
권력에 집착하는 바보, 돈에 굶주린 바보, 지식에 목마른 바보, 세상은 이런 바보들이 타고 있는 거대한 배다.
지은이는 온갖 바보들을 다룬 100여 편의 시, 그리고 시마다 곁들인 판화를 통해 바보들의 세상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한다. 학력의 폐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대학물을 먹은 바보가 악마의 실을 잣는다면 무수한 영혼을 지옥으로 빠트리게 된다네.” 그러나 문제를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었던 사정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지 이 책은 이런 말로 끝맺는다. “바보짓 하기보다 더 쉬운 게 어디 있나. 그렇다면 바보짓 그만두기도 쉽지 않겠나. 그러나 그만두어야지 마음먹어도 훼방꾼이 많으니 걱정일세.” 바보배에서 내리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남경태 / 저술가·번역가
남경태/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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