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문학산책
김윤식의 문학산책/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가오. 집에서 가까우니까 그럴테지, 라고 빈정대는 이가 있어 이렇게 대답하오. 그렇다, 라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지 않다, 라고. 후자 쪽에서는 이 박물관 탄생 장면이 들어 있소. 애초 이곳은 천하의 치외법권 지대. 미 8군 헬기장과 골프장을 겸했던 곳. 어떤 곡절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달랑 헬기장만 남기고 골프장은 원주인에게 돌려줬던 것. 용산 가족공원이 탄생했소. 그럴 수 없이 푸른 잔디. 또 구릉지대. 호수급 연못도 두 곳이나 있었것다. 여름 저녁이면 해오라기, 겨울 새벽이면 청둥오리떼가 정적을 깨는 곳. 이 속으로 해오라기도 청둥오리도 눈 흘기는 홍두깨 같은 날이 왔소. 대통령까지 참석한 1997년 초가을 벌어진 박물관 기공식이 그것. 하늘 같은 장막이 쳐졌소. 지옥 같은 공사판이 벌어진 지 8년의 세월이 간 2005년 초가을. 놀라워라. 은백으로 드러누운 쟁반 모양의 거대한 몸체(박승홍 설계). 치솟기를 버린 몸 낮춘 자세. 이 거대한 겸허가 은빛으로 휘황하지 않겠는가. 이 위대한 겸허 속에는 구석기에서 오늘에 이른 한반도의 삶이 숨쉬고 있지 않겠소. 이 숨소리를 듣자면 귀가 있어야 하는 법.
가장 맑은 귀를 가진 자, 그는 누구일까. 붐비는 공휴일, 관객 속에 서 있어 보시라. 대번에 그 해답이 찾아지오. 관객 속에 군데군데 끼어 있는 유모차의 아기들이 그들. 신석기와 더불어 들판을 달리는 들소떼의 발자국 소리, 계곡을 스치는 바람 소리란 그들에게만 들리는 법. 아기가 방긋할 때 들소떼가 멈추오. 아기가 잠들 때 바람 소리도 멎고 아기가 소리칠 때 돌도끼 든 신석기인도 땅을 밟고 있소. 관객 속에 유모차가 생각보다 많은 이유이오. 아기들이 이곳의 첫 번째 주인이니까 그럴 수밖에.
치솟기를 거부한 이 거대한 몸체 속에 삼국시대 한반도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소. 가장 밝은 눈이 있어야 하는 법. 그는 누구인가. 와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소. 교사의 인솔 아래 안하무인으로 떠들썩하게 박물관 퀴즈를 푸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보았는가. 곡옥 달린 금관도, 불룩한 배의 항아리 따위도 안중엔 없소. 있는 것이라곤 요동벌을 달리는 광개토왕의 말과 투구. 청룡·백호·현무·주작으로 현란한 벽화. 그들 눈에 어린 것을 무엇이라 이름 지을까. 역사 그것이 아니었을까. 역사란 새삼 무엇이뇨. 말하기, 서사의 세계를 가리킴인 것. 인류의 위대한 망상, 황당무계한 상상력의 세계. 교사의 지도가 요망되는 곳. 퀴즈를 풀듯 풀어야 되는 세계.
몸 낮춘 이곳의 세 번째 주인은 누구일까. 평일에 와 보시라. 그것도 오전 햇살이 폈을 때. 그림자만을 갖고 거니는 그는 한순간 인기척을 느꼈을 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였소. 아, 여기가 어딥니까. 미륵님은 고개 숙인 채 아무 말씀 없었소. 그 순간 그는 미륵님의 소리도 모습도 함께 온몸으로 깨쳤소. 시간과 공간이 표정으로 감지되었으니까.
귀로 듣는 아기에서 눈으로 보는 학생, 그리고 온몸으로 감지하는 이들은 얼마나 복된 무리일까. 어째서? 안 그런 자도 있는 법이니까. 대체 그자는 누구일까. 한때 맑고 밝은 귀와 눈도 가졌던 그자. 사노라고 소 갈 데 말 갈 데 뛰어다니다 이젠 머리에 서리를 인 남루한 탕아. 지친 몸으로 귀가하는 어느 무거운 오후. 하늘은 폭우·천둥·번개 요란했도다. 그 순간 그자는 보았도다. 그 천둥 번개 속에 드러난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은빛 몸체. 그 자는 헛소리처럼 외쳤도다. 아,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
김윤식 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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