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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낙원 없는 낙원 ‘샹그리-라’

등록 2008-02-01 19:35수정 2011-12-13 16:47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혹시 중국땅 나시족 마을 리장(麗江)에 가보셨소. 세계 문화유산의 하나로 소문난 관광지. 혹시 제일 크다는 썬룽(森龍)호텔에 든다면 로비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에 압도당하게 되어 있소. 사진들이 일제히 이렇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으니까. “여기가 진짜 샹그리-라다!”라고. 사진 촬영자는 이름도 선명히 조지프 F. 로크. 1924년에서 1935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식물을 조사하고 지리·문화 탐구를 한 인물. 이 사진사는 다만 그가 찾은 식물 및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풍속을 찍은 사진과 글을 〈내셔널 지오그래픽〉(1924~1935)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 수시로 보냈을 뿐.

이를 도서관에서 본 케임브리지 대학생이 있었소. 이름은 제임스 힐튼. 대번에 그는 소설 한 자루를 써버렸소. 왈 〈잃어버린 지평선〉(1933). 등장인물은 네 명. 옥스퍼드 출신의 영국영사, 수녀, 사기꾼 버너드, 부영사 따위. 인도에서 비행기로 페샤와르로 가는 도중 납치, 불시착. 장족의 안내로 첩첩산중을 톺아 기막힌 낙원 ‘푸른 달빛의 골짜기’에 도착. 놀라워라! 이곳 주민들의 평균 연령은 200살. 네 명이 이 비경 속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이곳 두목 대승정의 죽음이 오고 혼란이 오고 그 틈을 타서 영사 콘웨이만이 탈출하는 모험담.

제국주의의 청년답게 작가는 이 기막힌 세계를 두고 ‘샹그리-라’라 불렀소. 낙원을 가리키기만 하면 되는 낯선 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런데 어째서 이 말이 작은 영어사전에조차 실려 있을까. 하도 어이가 없다는 듯 사전 편찬자도 이렇게 주를 달 수밖에요. 제2차대전 중 루스벨트 대통령의 방송연설에서 미 공군기지의 암호로 이를 사용했다는 것.

여기까지 오면 궁금한 점 하나를 누르기 어렵소. 대체 작가는 뭣을 드러내고자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작품 초점 화자인 영사 콘웨이와 낙원 건설자인 대승정의 대화 속에 그 답변이 암시되어 있소.

“이 샹그리-라와 비슷한 곳이 서양에도 있는가?”(대승정)

“솔직히 말씀드려 이곳은 어딘지 옥스퍼드 대학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경치는 여기보다 못하지만.”(콘웨이)(팬북판, 142쪽)

케임브리지 대학생인 작가는 실상 옥스브리지 캠퍼스를 두고 “샹그리-라다!”라고 외쳤던 것. 오늘의 말로 하면 갈 데 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행패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윈난성 소수민족들이 서로 자기 고장이 ‘샹그리-라’라 외치며 서양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업은 일종의 통렬한 아이러니가 아닐 것인가.

4년 만에 다시 이곳에 들렀소. 변한 것은 변했고 안 변한 것은 또 그대로였소. 찻집 ‘사쿠라’(이곳 여주인은 부산 사람)도 책방도 그대로였소. 〈消失的地平線〉을 샀던 그 책방에서 이번엔 대형 컬러판 평전 〈조지프 로크와 샹그리-라〉(2006)를 샀소. 저자는 짐 굿맨. 호텔로 돌아와 밤새 읽을 수밖에. 첫 장에 가슴이 뛰었고 중간엔 숨이 가빴고 끝장에 오자 돌덩이를 얹은 듯 답답했소. 오지리 출신의 한 소년이 목사 되기를 원하는 아비의 뜻을 뿌리치고 마침내 동양으로 향한 것이 1902년. 미국 농무부가 현상금으로 내건 기묘한 약용 식물 발견으로 직업과 명성을 얻고 식물표본 만들기와 연구자로 중국 오지에까지 왔던 것. 1962년 67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독신으로 오직 외길인생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이 책 속엔 단 한 줄의 ‘샹그리-라’도 없을 수밖에. 책을 덮고 창문을 열자 거기 꿈인 듯 새벽 햇발을 받은 위룽설산(玉龍雪山, 5596m)이 황홀히 솟아 있었소.


김윤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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