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간을 꿈꾸는 중년의 잠 못 이루는 밤
〈거룩한 허기〉
전동균 지음/랜덤하우스·6000원 인생이 헛껍데기 같아 출가 꿈꾸다가도
딸들이 눈에 밟혀 주저앉곤 하던 날들
시인은 세속에서 출가하기를 선택하네 조계종이 출가 연령 상한을 50살에서 40살로 낮추었던 2002년 가을, 막연한 상실감에 잠 못 들고 밤새 뒤척이던 중년들이 있었다. 전동균(46)씨도 그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세 번째 시집 〈거룩한 허기〉에서는 끈질긴 출가에의 충동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려는 심사가 시종 길항한다. “마흔 넘어서/ 눈이 새까만 계집아이 둘 옆에 누이고서도/ 출가의 꿈을 꾸며/ 몸 뒤척이는/ 몹쓸 날들”(〈국도변〉 부분) “먼 길을 돌아 왔구나/ 어느새 젖가슴 봉긋한 아이의 손을/ 부적처럼 꼭 쥐고/ 왔구나”(〈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 부분) 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출가를 꿈꾸며, 딸들 때문에 종내는 자신을 주질러 앉힌다. ‘불구하고’와 ‘때문에’ 사이에서 시인의 회한은 쌓여 가고 그 회한의 수미산이 시집 〈거룩한 허기〉를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시집은 차마 여의지 못한 인연의 기록이라 할 법하다.
사람은 왜 출가를 꿈꾸는 것일까. “살아도 살아도 오늘이 어제 같은”(〈만장봉〉) 날들이 이어지거나,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과 혼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절〉) 할 때, “몸은 마음을 멀리하고/ 마음은 또 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흔셋, 병중(病中)”(〈초추(初秋)〉)에서 사람은 출세간을 그리워한다. 산다는 게 본질과는 무관한 헛껍데기로 여겨질 때, 생로병사와 윤회전생의 감옥에서 한번쯤 벗어나고 싶어질 때 “내설악 절벽에 굴을 파고/ 십 년 묵언정진에 들어갔다는/ 어떤 이”(〈초추〉)가 문득 부러워진다. 세속에서 출세간을 넘보는 시인에게 ‘저쪽’에서는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시월 아침, 문틈으로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작은 씨르래기 한 마리”(〈씨르래기에게 말을 건네다〉), 혹은 인왕산 쪽에서 흘러와 창가의 풍경(風磬)을 흔드는 서늘한 바람줄기(〈바람의 눈을 들여다보며〉)로 몸을 바꾸어 방문하는 “이것들이 혹/ 사랑이나 죽음이나 신 같은 것들의 숨결이거나/ 그림자는 아닐까,”(〈까치발 세우고〉) 시인은 마음 설렌다. 그러나 출가의 길이 뻥 뚫린 고속도로인 것은 아니다. 좁고 복잡한데다 사방에 장애물이 널려 있는 최악의 도로사정이 출가를 꾀하는 자의 앞을 가로막는다. 시인은 결국 길을 나서기를 포기한다. “나는 신발 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 눈물 훔치고는/ 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 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얼음폭포 근처〉 부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속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어쩌면 출가보다도 더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 세속에서 출가하기, 혹은 제 안에 절을 들이기가 그 길의 이름이다. “달빛 환한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 회색 벙거지를 쓰고/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본다/ 얼쑤, 어깨춤도 춰본다”(〈벙거지를 쓰고〉 부분) “내 속의 어떤 절을 향해 무릎 꿇고/ 공양을 올린다”(〈절〉 부분) 세속에서 출가하기란 합장하고 절을 올리는 형식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 숟가락 하나, 밥 한 그릇/ 영원히 깨뜨려야 할/ 나의 은산철벽”(〈은산철벽〉)을 응시하며 비루한 나날을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일상의 구법행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진리는 산중에 있고 세속은 다만 타락의 처소라고는 말하지 말자. 조계종은 지난 2005년 출가 상한 연령을 50살로 되돌렸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전동균 지음/랜덤하우스·6000원 인생이 헛껍데기 같아 출가 꿈꾸다가도
딸들이 눈에 밟혀 주저앉곤 하던 날들
시인은 세속에서 출가하기를 선택하네 조계종이 출가 연령 상한을 50살에서 40살로 낮추었던 2002년 가을, 막연한 상실감에 잠 못 들고 밤새 뒤척이던 중년들이 있었다. 전동균(46)씨도 그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세 번째 시집 〈거룩한 허기〉에서는 끈질긴 출가에의 충동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려는 심사가 시종 길항한다. “마흔 넘어서/ 눈이 새까만 계집아이 둘 옆에 누이고서도/ 출가의 꿈을 꾸며/ 몸 뒤척이는/ 몹쓸 날들”(〈국도변〉 부분) “먼 길을 돌아 왔구나/ 어느새 젖가슴 봉긋한 아이의 손을/ 부적처럼 꼭 쥐고/ 왔구나”(〈앵두나무 아래 중얼거림〉 부분) 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출가를 꿈꾸며, 딸들 때문에 종내는 자신을 주질러 앉힌다. ‘불구하고’와 ‘때문에’ 사이에서 시인의 회한은 쌓여 가고 그 회한의 수미산이 시집 〈거룩한 허기〉를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시집은 차마 여의지 못한 인연의 기록이라 할 법하다.
사람은 왜 출가를 꿈꾸는 것일까. “살아도 살아도 오늘이 어제 같은”(〈만장봉〉) 날들이 이어지거나,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믿지 못하고/ 내 영과 혼은 자꾸 나를 떠나려고”(〈절〉) 할 때, “몸은 마음을 멀리하고/ 마음은 또 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흔셋, 병중(病中)”(〈초추(初秋)〉)에서 사람은 출세간을 그리워한다. 산다는 게 본질과는 무관한 헛껍데기로 여겨질 때, 생로병사와 윤회전생의 감옥에서 한번쯤 벗어나고 싶어질 때 “내설악 절벽에 굴을 파고/ 십 년 묵언정진에 들어갔다는/ 어떤 이”(〈초추〉)가 문득 부러워진다. 세속에서 출세간을 넘보는 시인에게 ‘저쪽’에서는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시월 아침, 문틈으로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작은 씨르래기 한 마리”(〈씨르래기에게 말을 건네다〉), 혹은 인왕산 쪽에서 흘러와 창가의 풍경(風磬)을 흔드는 서늘한 바람줄기(〈바람의 눈을 들여다보며〉)로 몸을 바꾸어 방문하는 “이것들이 혹/ 사랑이나 죽음이나 신 같은 것들의 숨결이거나/ 그림자는 아닐까,”(〈까치발 세우고〉) 시인은 마음 설렌다. 그러나 출가의 길이 뻥 뚫린 고속도로인 것은 아니다. 좁고 복잡한데다 사방에 장애물이 널려 있는 최악의 도로사정이 출가를 꾀하는 자의 앞을 가로막는다. 시인은 결국 길을 나서기를 포기한다. “나는 신발 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 눈물 훔치고는/ 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 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얼음폭포 근처〉 부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속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어쩌면 출가보다도 더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 세속에서 출가하기, 혹은 제 안에 절을 들이기가 그 길의 이름이다. “달빛 환한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 회색 벙거지를 쓰고/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본다/ 얼쑤, 어깨춤도 춰본다”(〈벙거지를 쓰고〉 부분) “내 속의 어떤 절을 향해 무릎 꿇고/ 공양을 올린다”(〈절〉 부분) 세속에서 출가하기란 합장하고 절을 올리는 형식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 숟가락 하나, 밥 한 그릇/ 영원히 깨뜨려야 할/ 나의 은산철벽”(〈은산철벽〉)을 응시하며 비루한 나날을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일상의 구법행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진리는 산중에 있고 세속은 다만 타락의 처소라고는 말하지 말자. 조계종은 지난 2005년 출가 상한 연령을 50살로 되돌렸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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