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지난달 18일 거제대교를 건넜소. 충무공께서 왜적과 대치했던 견내량(見乃梁)의 물빛을 보았소. 달이 서산에 걸려 있어 산 그림자 드리워 바다의 반쪽은 어렴풋이 그늘져 있었는데 그 그늘져 어두운 쪽을 따라 왜선들이 무수히 접근해 오지 않았던가.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장군이기에 가히 신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징비록>에 적힌 그 물빛을 옆으로 하고 마침내 닿은 곳은 거제도 둔덕면 방하리. 거기 청명 하늘에 둥실 떠오른 애드벌룬엔 이렇게 적혀 있었소. ‘탄생 백주년, 청마기념관 준공식’이라고.
먼저 의문 하나를 물리치기 어려웠소. 어째서 그 흔한 문학관이란 말을 굳이 피했을까가 그것. 곡절이 없지는 않겠으나 물어볼 데도 없어 가만히 있을 수밖에.
두 시 정각에 준공식이 거행되었소. 인상적인 것은 다음 세 가지. 방하 마을 뒷산에 있는 ‘시인 청마 유치환의 무덤’을 보살펴 달라는 유족의 인사말씀이 그 하나. 또 하나는, 이 점이 소중한데, 청마 유치환 전집(전6권)이 봉헌되었다는 것. 이 전집(박철석 감수, 남송우 편)에는 시인 자신이 버린, 그 때문에 그동안 논쟁의 대상으로 된 작품들도 모조리 수록되어 있었소. 셋째 복원된 생가 옆에 세워진 장대한 이층 기념관 안에 원본, 육필, 사진, 편지 등과 함께 전시된 표구된 거대한 시화 한 편. 제일 높은 곳에 놓여 기념관 전체를 굽어보고 있는 시의 제목은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림은 모란 꽃밭, 수묵화. 시 제목 앞엔 ‘위청마(爲靑馬)’라 적혀 있었소. 누가 청마에게 준 것일까. 가까이 가서 서명을 눈여겨볼 수밖에. 그림은 청계(靑谿), 글씨는 정지용이 아니겠는가. 날짜는 경인(庚寅, 1950)년 5월. 청계라면, 그러니까 월북하여 거기서 활약한 정종여(鄭鍾汝). 두루 아는바 정지용은 화문행각 기행을 <국도신문>(1950.5.7~6.28)에 연재한 바 있거니와 이에 대해 정작 청마는 이렇게 적었소.
“그 길에 내 고향인 통영에 들러 내 집에서 일주일 남짓을 저녁이면 술판을 벌여 놓곤 즐겁게 보냈었다”(<예지를 잃은 슬픔>, 1963)라고.
영랑의 모란을 매개로 하여 보도연맹에 묶인 정지용과 대한민국 정식정부(김동리 용어)의 대표적 시인 청마가 마주 앉아 6·25를 꿈에도 예감치 못한 듯 술판을 앞에 놓고 “찬란한 슬픔의 봄”을 함께 기다리며 시화를 논하고 있었것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청마기념관은 문학사적 기념관의 풍격 하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필시 문학사적이자 동시에 정신사적 풍격도 따지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어렵겠지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기념관이 권고한다면 어떠할까요.
“지루하겠지만 그대 내 전집을 펴놓고 한밤중까지 기다려 보시라. 여기 그럴 수 없이 투명한 둔덕 방하리 밤하늘. 드디어 그대는 세 자리 북두칠성을 보게 되리라. 하나는 북만주 광야에서 내 아이들과 가정을 지켜주던 그 북두칠성(<경이는 이렇게 나의 신변에 있었도다>, 1940?). 두 번째는 성스런 북두에 내가 대들고 싶었던 불경스러운 장면(<북두성>, 1944). 셋째는 밤마다 꿈자리에 나타나 알지 못한 채 맺은 인연을 이제는 해명하라고 재촉하는 북두(<북두>, 1953)를.”
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