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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너만의 가짜를 만들어 세상에 복수하라”

등록 2008-06-27 20:35

소설가 고예나 씨
소설가 고예나 씨
제3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가짜 위안’ 의지하는 ‘짝퉁인생’
“안티칙릿”…‘유사칙릿’일 수도
〈마이 짝퉁 라이프〉
고예나 지음/민음사·1만원

제3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고예나(24)씨의 소설 <마이 짝퉁 라이프>가 책으로 나왔다. 두 개의 영어 단어와 하나의 속어로 이루어진 제목부터가 도발적인 동시에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마이 짝퉁 라이프>에는 대학생 또는 대학 휴학생인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오피스텔에 딸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휴학생 ‘나’(이진이)를 중심으로, 단짝 친구인 B와 또 다른 친구 R이 각자의 방식으로 젊은 세대의 성과 사랑의 풍속도를 그려 보인다.

딱 한번, 지독하게 사랑했다가 잔인하게 배신당한 상처를 지닌 진이는 더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또 다시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런 그의 곁을 남자친구 Y가 속절없이 맴돌지만, 진이는 그와의 거리를 한사코 지키려 한다. 진이를 위로하는 것은 통신회사에서 보내주는 유료 문자 메시지일 뿐.

큰 가슴이 자랑인 B는 처음 만난 상대와의 사랑 없는 섹스를 부나비처럼 좇는다. 그런 그 역시 순정했던 첫사랑이 쓰라린 환멸로 바뀐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R은 혼신의 힘을 다해 진정한 사랑과 낭만적인 연애를 추구하지만, 그 사랑이란 그가 들고 다니는 짝퉁 가방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이비이기 십상이다. ‘가짜 위안’에 의지하기는 진이나 B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세 인물의 삶은 여지없는 ‘짝퉁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짝퉁에게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는 있다. 다음은 16년 동안 짝퉁만을 애용해 오신 ‘이미’ R 선생님의 말씀이시다.


〈마이 짝퉁 라이프〉
〈마이 짝퉁 라이프〉
“첫째, 싸다. 싼 것은 좋은 것이여. 둘째, 그냥 보면 진짜 같다.(…) 셋째, 수요가 많아서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가짜가 많다고 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어.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면 되는 거야. 가짜로 인해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잖아.”(170~171쪽)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세 사람의 가족 구성 또한 이른바 ‘정상’과는 거리가 먼, 짝퉁이다. 주인공 진이는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여기에는 밝힐 수 없는 반전이 숨어 있다) 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사랑하는 다른 여자가 수시로 집을 들락거린다. 소설 말미에서 진이는 지난 사랑의 기억을 떨쳐 버리고 Y에게 마음을 여는 동시에, 죽은 어머니의 사진을 찢어 버리고 ‘아버지의 여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진이가 <손자병법>의 ‘반간계’(反間計)를 응용해 정립한 ‘가짜의 권리 선언’은 이런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것이다.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만든 진실이 미워지면 너만의 가짜를 만들어라. 네가 원하는 그 상상이 진짜다. 네 진심이 깃든 상상으로 이 세상에 복수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244쪽)

<마이 짝퉁 라이프>는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소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요즘 유행하는 ‘칙릿’을 닮았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굳이 분류하자면 내 소설은 ‘안티 칙릿’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주인공들이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생산자도 소비자도 아닌 세대라는 점이 그 근거다. 그렇지만 칙릿의 주인공들처럼 진짜 명품을 소유하지는 못해도 이들 역시 가짜 명품을 추구하는 유사 소비자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소설을 ‘유사 칙릿’이라 이를 수도 있겠다. 안티 칙릿이든 유사 칙릿이든, 1980년대산 작가의 이 소설은 앞선 세대 작가들의 작품과는 확실히 다르다. “선배 작가들의 소설이 자신의 내면을 파먹는 식이었다면, 우리 세대는 상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유쾌하게 웃어넘기는 데에 익숙하다”고 이 당돌한 신인은 말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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